[이근 교수] 바이든 정부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트럼프가 아니다 (한국일보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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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0

지난 수년간 국제질서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무엇일까? 많은 독자들이 4년 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떠올리겠지만 예상과 달리 지금의 국제질서, 즉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2020년 초반 전 세계로 퍼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코로나19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아예 멈춰 세웠다. 국가 내부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사람과 물품의 이동이 제한됐다. 적성국, 우방국을 모두 포함한 이동 제한이었다. 국가 간의 협력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외교 무대는 대형 스크린 안으로 이동해 답답함만을 부추기고 있다. 전 세계 스포츠 행사인 도쿄 올림픽은 아예 열리지도 못했고 세계경제는 침체기로 들어섰다.

국제질서에 가장 큰 충격은 트럼프 아니라 코로나19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19세기까지의 국제질서와 다르게 전 세계가 하나의 자유시장경제로 묶인 질서를 의미한다. 이 국제시장이 작동하는 환경과 원리는 국내에서 자유시장경제가 작동하는 그것과 동일하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장 참여자가 따르는 법과 규범이 있어야 하고 이를 관장하는 기구들이 있어야 하는데, 국제적으로는 국제법과 규범, 국제기구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총칭해 '다자주의'라고 부른다.

시장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요건은 치안, 즉 안전과 안정이다. 매일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혁명이 발생하면 시장은 작동을 멈춘다. 국제시장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이 무력 분쟁, 전쟁 등인데 국내에서는 경찰력이 치안을 유지해 주고 국제시장에서는 '국제 안보'(international security)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위시한 동맹 네트워크가 군사력으로 안정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돌아가는 국제질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라고 부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질서에 준 충격은 그가 연출한 소란스러운 광경에 비해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 그가 있어도 시장은 예전처럼 돌아갔고 국제질서에 충격을 줄 무력 분쟁도 거의 없었으며 국제법과 규범도 근본에서부터 무너지지 않았다. 동맹 네트워크도 비용 분담의 면에서 소란스러웠지만 기본적인 국제안보는 작동하고 있었다. 트럼프라는 인물이 연출한 '극장정치'가 잔잔한 드라마가 아니라 액션물이어서 뭔가 큰 혼란이 생기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지만 극장 뒤에서 세계는 이전과 다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트럼프가 재선을 위해 가장 신경 쓴 것이 미국의 경제지표인 만큼, 그도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다. 이 질서를 일거에 멈춰 세운 것은 트럼프가 아니라 코로나19였다. 시장이 작동하는데 있어서 '안전과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 사건이다.

백신 보급을 둘러싼 리더십이 바이든 정부 첫 시험대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선방하는 이유는 훌륭한 경제정책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코로나19 방역을 잘 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안전과 안정을 제공해 시장이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제 및 사회생활에 있어서 공공부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다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국에서 코로나 19를 극복해 안전하고 안정적인 국제적 공공영역을 부활시켜야 한다. 새롭게 탄생할 미국 바이든 정부의 국제적 리더십은 여기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자국에서의 코로나19 방역능력과 백신 개발 이후 백신보급을 둘러싼 국제적 리더십이 제일 먼저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첫 일정은 '코로나19 태스크 포스'의 출범에서 시작하고 있다. 문제를 정확히 읽고 신속한 해결을 시도한다는 면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에서 코로나19 방역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면 그 이후에는 백신 리더십이 중요해진다. 일시적으로 멈춰선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전면적으로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신속하고 공정한 백신 보급이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자국 중심주의를 택했을 것이므로 백신 보급을 두고 엄청난 혼란이 있었을 것이지만 바이든 리더십은 국제협력을 강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리더십에서 성공하면 미국은 다시 세계에서 존경받는 리더로 복귀할 수 있다. 물론 바이든 당선자의 경력이나 성품으로 보아 재미는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보다는 훨씬 품위있는 언동을 통해 세계의 지도자스러움도 보여줄 것이다.

외교전문가 바이든, 트럼프 보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반중 노선 강화할 것

바이든 당선인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30년 동안 활약을 하였고 부통령 시절에도 외교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외교 전문가이다. 비록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지만 중동 분쟁에 관해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고 이란 핵 문제도 기존의 핵 협정을 지지하는 다자적 해법을 추구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파리기후협약에 취임 첫날 재가입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할 정도로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국제 제도와 규범을 존중한다. 이념적으로는 반중, 반러 노선에 충실하고 민주주의 국가 간의 연대와 협력을 중시한다. 동맹관리에 있어서도 방위비 분담 문제보다는 역할의 분담에 더욱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즉 전통적인 민주당의 대외정책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국제정치에 관한 세계관은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가 이끄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강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제적 리더십은 2021년 동안 코로나19 극복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미중관계의 향방도 읽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각시킨 미국의 반중 노선은 두 개의 전선이 중첩돼 있다. 하나는 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념이다. 경제의 경우 4차 산업혁명 시장을 누가 선점해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반도체, 인공지능 (AI),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에서 반중 전선이 형성돼 있고 이념 전선은 민주주의와 독재의 이분법 위에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이 두 개의 전선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동맹을 통해 세계가치사슬을 재편하고 주요 기술의 이전을 통제할 것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권력보다 훨씬 견고하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의 적은 트럼프가 아니라 양극화로 치닫는 불공정한 시장 그 자체일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안팎에서 이를 고쳐낼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