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오피니언 포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의 조건 (문화일보 2019.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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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문재인 대통령의 74주년 광복절 경축사가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한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한 일본과의 갈등을 심화시킬 것인지, 숨 고르기 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였기 때문이다. 만약 반일감정을 유도하고 무역전쟁을 확대하려 한다면 일본도 다음 단계의 조치를 꺼내 들 것이란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기우(杞憂)와는 달리 일본 규탄은 없었다. 그 대신 일본에 관한 한 ‘3무(無) 연설’이었다. 우선, 광복절 경축사에 단골 메뉴였던 과거사에 대한 사과나 반성 요구가 없었다. 또,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공세적인 대응 조치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리고 여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2020도쿄올림픽 참가 거부 같은 자극적인 언동에는 선을 그었다. 기본적으로 일본발 경제위기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하고 이를 극복해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대(對)국민 메시지를 내면서도, 일본과는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열고, 일본의 대응을 기대하는 형세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3가지의 점잖은 주문을 마다하지 않았다. 첫째, 일본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성찰(省察)’을 주문했다. 일본이 이웃 나라에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 나가자고 함으로써 과거사에 겸허해질 것을 요구했다. 둘째, 일본과 안보·경제 협력을 지속해 온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과 함께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자 해 왔다’고 함으로써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고통의 분담을 제시했다. 셋째, 국제 분업 체계 속에서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하는 것은 평화로운 자유무역 질서를 깨는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부당한 수출 규제 조치를 거두어줄 것을 주문했다.

경축사의 백미는 ‘평화경제’ 살리기였다. 흔들리는 북한과의 대화 국면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고 북·미 간 실무협상의 조기 개최를 희망하면서 ‘대화를 통한 비핵화’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 바탕 위에서 남북 경제 협력을 촉진하고 평화경제를 통해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이를 통해 동북아 다자협력 구도를 구축하고 우리 경제의 신(新)성장동력을 만들자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평화경제 관련 부분은 여전히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미사일 도발을 일삼고 있는 북한에 대한 한마디의 경고도 없었던 점은 아쉽다. 그런데 북한은 16일에도 ‘미사일’을 발사하고 문 대통령의 경축사를 비난하면서 남측과 다시는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했다. 대화와 협력을 외치는 한국이 북한의 망동을 허용하면서 ‘호혜적인 질서’를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분단 체제의 극복이라는 이상은 좋지만 평화경제는 순서상으로 비핵화 이후에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임기 내’에 확고히 하겠다는 다짐은 시기적으로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국가적 어젠다여야지 정권의 어젠다여선 지속적인 추진이 곤란하다. 평화경제라는 표현은 듣기엔 좋지만, 누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지가 추상적이다.

국민도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될까 봐 노심초사다. 국민은 ‘새로운 한반도’도 실현되길 바란다. 하지만 남북한 평화 분위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다. 비핵화된 북한을 원하고, 안보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이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