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근 교수](시론) 잘돼도 못돼도 골치인 브렉시트 (중앙일보 20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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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금융·실물 불확실성 커진 가운데
국제 공조로 충격 최소화돼도
유럽연합 추가 이탈 부추길 듯
생존 위한 국가 차원 대응 필요

악순환이다. 미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재정위기로 번져 가더니 결국 이주민 대란을 촉발한 사회위기를 몰고 왔다. 이 과정에서 세계 곳곳에 민심 이반이 생겨나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대의와 명예를 최고 가치로 내세우던 영국마저 자국 이익을 이유로 유럽연합(EU) 탈퇴를 감행하는 현 상황에서, 과연 어디까지 후폭풍이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장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현실화됐고 네덜란드·프랑스·이탈리아·스웨덴·덴마크 등 주요국의 추가 이탈 가능성으로 EU의 존립까지도 우려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충격은 고스란히 세계 금융체제뿐만 아니라 실물경제 부문에 전례 없는 파장을 초래할 전망이다. 브렉시트는 일반적인 금융위기보다 해결하기 훨씬 어려운 딜레마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각국의 정책 공조가 성공적으로 작동돼 다행히 브렉시트의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경우 도리어 이탈의 비용을 감수한 여타 EU 회원국들의 추가 이탈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반대로 추가 이탈을 억제하기 위해 브렉시트로 초래되는 영국 경제에 대한 피해를 응징이나 보복 수준으로 키우는 경우 그 자체로 세계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야기하게 된다.

또한 금융 중심지로서 영국의 위상 하락과 금융산업 재편은 미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독일과 일본 등 기축통화국들 간에 불가피한 주도권 다툼을 촉발한다. 브렉시트의 피해가 금융위기 후유증으로 시달려 온 그리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 특정 EU 회원국들에 더욱 크게 발생하게 되는 점도 EU 차원에서 공동의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큰 걸림돌이다. 이와 같은 브렉시트의 경제적 딜레마는 향후 세계 경제체제가 풀어야 할 복잡한 정치적 선결 과제를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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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세기 초반 자유무역이론의 발원지였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하는 등 새로운 국제 금융체제를 기획하고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주도했다. 이뿐만 아니라 1940년대 중반 미국 의회가 국제무역기구 설립을 폐기하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살려내 세계 무역체제 발전의 초석을 닦은 주역이다. 그러한 영국이 무역을 넘어선 경제 통합의 선도적 모델을 제시하던 EU를 탈퇴함으로써 자칫 경제공동체 해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EU도 영국의 탈퇴로 핵심 구성원을 상실하면서 상대적 위상이 축소됐다. 그 결과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질서가 한층 더 강화된 점은 향후 국제사회를 이해하는 데 주목할 부분이다.

공중살포 방식의 통화 공급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책까지 동원해 겨우 안정 기미를 되찾은 세계 시장에 브렉시트라는 악재는 현재진행형인 글로벌 금융위기 전개의 변곡점이 될 소지가 크다. 엔화 가치 급등으로 아베노믹스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으며 미국의 금리 인상 등도 지연이 불가피하게 됐다. 우리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신흥국 시장은 단기 변동성 확대로 자본 유출 문제가 심각해질 전망이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초래된 다양한 산업 분야의 구조적 문제 해결도 한층 어렵게 됐다. 국내의 금융경색 가능성 역시 촌각을 다투는 구조조정과 경기부양 조치에 중대한 장애 요인이 될지 모른다.

영국을 비롯한 모든 EU 회원국은 EU와는 별개로 세계무역기구(WTO)에 회원국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세계 무역 측면에서의 혼란은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다. 대부분의 WTO 회원국은 EU와 설정한 무역 관계를 영국에도 최대한 그대로 적용하는 방식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경제공동체로서 역내 자본 및 인력 이동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EU로부터의 탈퇴는 영국·EU 양자 간 교역과 투자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게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영국으로부터의 투자 이전 문제는 우리 산업계도 서둘러 대비해야 할 사안이다.


이제 전 세계 지도자가 발 벗고 나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해 지난 70년간 일구어놓은 무역과 자본 그리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국경 간 이동이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는 ‘트럼프 현상’의 장벽에 가로막힐 위기에 처했다. 자유무역 체제의 발전과 함께 기적을 일궈 온 우리 경제도 성장의 발판이 상실될지 모를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97년 외환위기 때와 맞먹는 경각심을 가지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위기 관리 체제를 가동해야 한다. 산적한 구조조정 과제와 고령화로 유발되는 사회구조 변화만으로도 부담스러운 대한민국 앞에 보호주의와 국수주의로 극심해진 국제사회의 생존 경쟁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우왕좌왕하는 선원들을 향해 “Be British(영국인으로서 처신하라)”라는 한마디로 최후까지 승객의 안전과 탈출을 지휘했다. 지금은 휘청이는 대한민국호를 끌고 가는 선장의 “Be Korean” 구령과 이를 떠받치는 정치권, 정부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