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오피니언) 정치는 뭐든 해도 된다는 망상 (문화일보 20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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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요즘 어디 가서 정치학이 전공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던 정치와 현실 정치가 너무 달라서다. 국익이나 국민 통합 같은 거창한 개념은 눈 씻고 찾아봐도 드물다. 정치는 국민 통합이 아닌 편 가르기가 됐고, 정책에 묘수는 안 보이고 꼼수만 넘친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해결하긴커녕 점점 크게 만든다. 정치가 끼어들지 않는 곳이 없어서 외면하기도 어렵다. 정치 얘기는 접어두고 부동산, 교육, 가족 건강을 걱정하던 동네 학부모들이 ‘정치가 왜 이래’라고 할 정도다. 국민 모두를 정치에 끌어들이려 했다면 성공일지 모르지만, 만인을 정치의 소용돌이에 불러들이면 정치인들에게도 부담일 텐데.

‘편 가르기 정치’가 전면에 서면서 과학과 합리성은 뒷걸음치고 있다. 현실적인 기준과 객관적인 검증이 없이 지지층 결집과 표 획득에 도움이 될 듯하면 기존의 결론이 슬그머니 뒤집힌다. 멀쩡한 김해공항 확장 계획을 밀어내고, 가덕도신공항 건설 계획을 언론에 띄운다. 불과 4년 전 국제전문가 그룹의 판단 결과는 온데간데없다. 정부 연구기관에 의한 예비 타당성 조사조차 건너뛰기다. 7900억 원이나 쏟아부은 신한울원전 3·4호기 건설 중단 사태는 ‘정치권에 물어보라’는 한마디로 도중하차다. 외국에는 원전을 팔면서 국내에는 건설해선 안 된다는 이유가 어설프기 그지없다.

관료들은 침묵과 은폐의 동조자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공무원들에게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쓴소리도 하라는 건데, 불평하거나 반대하면 좌천시키거나 적폐로 내몰기 일쑤니 아예 일을 안 벌인다. 부동산 대책을 24번이나 내놨는데도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무주택자들이 전전긍긍한다면 대책이 틀린 게 분명한데, 전문가 의견도 제대로 안 듣는다. 무주택자, 전세 세입자, 주택 보유자 모두 한꺼번에 화나게 하는 정책을 내놓고도 국민 고충과 불만은 ‘나 몰라라’ 한다.

언론은 진실의 반쪽만을 부각시키는 게 일상화했다. 권력을 쥔 쪽의 잘못은 슬그머니 감추고, 비판하는 쪽들의 허물만 부각시킨다. 보수 세력이 집회하면 코로나가 확산된다며 원천 봉쇄하라면서, 민주노총이 집회하면 소규모로 살살 하라고만 한다. 정치인이 국회 속기록에 남아 있는 말을 대놓고 부정하는 데도, 언론은 살짝 비판하는 시늉만 내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각종 지원금을 남발하면 정부 곳간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데, ‘증세(增稅) 없는 복지 없다’는 불편한 진실은 공론화하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최후의 보루인 법 집행에는 ‘선택적 정의’만 있다. 내 편이면 무죄고, 상대편이면 일단 유죄 추정이다. 나라 곳간을 거덜 내는 도둑들은 수사도 못하게 하고, 라임과 옵티머스에는 사기·비리·부패의 냄새가 진동하는데 법원에 넘길 기미가 안 보인다. 감사원 감사 때 국가 공무원이 공문서를 444건이나 훼손·폐기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청와대가 개입된 선거 공작은 여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으니 덮고 넘어간다.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더니 정권에 칼을 대니 적폐 청산 수사 때 영웅시했던 검찰총장을 토사구팽을 넘어 적대시한다. 예전 같으면 장관이나 관계자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청와대나 여권의 부담을 줄여주는 게 예사였는데, 이번 사건들은 예사롭잖은 모양이다.

권위주의 아래서 조폭과 같은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화를 했는데, 정치 조폭들이 다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치가 설득과 타협이 아니라, 약탈과 강압에 가까워지면 민심은 꿈틀거린다. 정치권은 늘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절대 진리가 있다는 종교적 믿음 때문이 아니다. 맑은 날도 있지만, 궂고 험악한 날도 있기 때문이다. 늘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민주정치에서는 들판에 나서는 일도 있다. 그래서 ‘야(野)’라고 하는 거다. 정치는 삼갈 줄 알아야 통한다. 정치가 과잉이면 나라가 흔들리고, 정치가 모든 생활에 파고들면 국민이 피곤하다. 정치가 모든 걸 쥐고 흔들며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망상(妄想)과 오만(傲慢)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은 맞지만, 순리를 거슬러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