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교수](박태균 칼럼)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만 빼고 (한겨레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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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역내 평화를 위협한다면 하지 않아야 할 일도 있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하자는 것도 하고 중국이 하자는 것도 해야 한다. 단지 이승만 대통령처럼 벼랑끝 전술을 써서는 안 된다.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일방적인 행동을 강행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1952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 제거 계획이 바로 그 모종의 계획이었다.

미국 정부는 전쟁 상황에서 왜 이승만 대통령 제거 계획을 세웠을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에서의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군이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를 위해 공산군 측이 정전협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공산군 측이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정전협정에 동의하였지만,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유엔군이 파견되어 있는 상황에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한국에 민주주의가 없음을 만방에 알렸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제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상호방위조약 제안을 수용했다. 물론 정전협정 이전에 맺는 것은 어려웠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빌미로 하여 공산군 측이 정전협정을 반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공포로 석방이 강행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이승만 제거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 시기 한국 방문은커녕 친서도 보낸 적이 없다. 한-미 간의 신뢰는 바닥을 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을까? 정치 9단이 그랬을 리 없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제거계획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군과 여당의 수뇌부를 측근 인물들로 교체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이 미국과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왜 이러한 모험을 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자신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거하려 했다면 이미 1952년에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 통에 무리한 정책은 세계 여론의 비난뿐만 아니라 전쟁을 실패로 몰아갈 수도 있었다. 아울러 당시 한국의 정치인 중에는 이승만과 같이 강한 반공정책을 추진하면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 없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한국에 양자 간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제로섬 관점에서 서로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미·중은 한국이 한쪽에 가까이 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추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국의 승전기념일 행사에서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게 한 중국이나, 그 직후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방문, 무리한 위안부 합의, 그리고 사드 배치를 처리한 미국이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양국은 한국을 버린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끌어안으려고 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제 양국에 있어서 한국의 위치는 더 중요해졌다. 한국은 1945년 미국이 대외원조를 주었던 수많은 국가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역사를 쓴 국가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버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미국 경제가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꺼리고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군 대신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종전선언과 평화회담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으면서도 불편함을 표시 못 하는 중국의 입장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의 신남방정책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접목되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고 있다. 한국 내 일부에서는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마치 한-미 동맹이 파탄 나고 한국이 중국으로 기우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 그것 자체가 한국뿐만 아니라 역내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역내 평화를 위협한다면 하지 않아야 할 일도 있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하자는 것도 하고 중국이 하자는 것도 해야 한다. 단지 이승만 대통령처럼 벼랑끝 전술을 써서는 안 된다. 이는 부시 전 대통령이 규정한 불량국가나 하는 짓이다. 양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지피지기라면 위기와 기회는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다. 한국의 적극적 움직임은 오히려 동맹국과 우방국들을 더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