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교수](박태균 칼럼) 대타협이 필요한 이유 (한겨레 2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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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고, 무엇이 궁극적 목적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서로가 같아지기는 어렵겠지만, 이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목표를 공유함으로써 공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박태균 ㅣ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2년 전 동아시아학을 전공하는 미국의 한 교수가 질문을 보내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었던 광화문에서의 집회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현재 일본과 프랑스의 극우 정치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면서 한국의 경우를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달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시민들의 시위나 항쟁은 하나의 이슈로 촉발되고, 그 이슈가 해결되면 가라앉기 마련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슈가 발생하면서 다른 성격의 시위가 나타나곤 했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항쟁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 있었던 대부분의 시위와 항쟁이 이런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소위 ‘태극기’ 시위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제2차 코로나19 확산의 책임으로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시위를 강행하겠다고 한다.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언젠가는 분석을 해야 하겠지만, 지금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 와 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학술대회에서도 남북갈등보다도 남남갈등이 더 심각하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우선 매카시즘적 현상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냉전에 뿌리를 둔 보수 그룹들이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막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십년 전의 매카시즘을 동원해, 낡은 프레임으로 대중매체를 장악함으로써 변화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1987년의 민주화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극대화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이제 일부 극단적인 종교와 결합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이렇게 현상만 분석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골이 너무나 깊다.

여기에 더하여 코로나19가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97년의 금융위기 앞에서 한국 국민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사회안전망의 불비로 인하여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탄생할 정도로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사각지대가 발생했다. 지금의 팬데믹 상황에서 시민 사회의 협조는 정부의 성공적 방역정책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진행되면서 서구 사회에서 나타났던 갈등의 심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2.5단계를 3단계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소상공인들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방역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의견과 불평등의 심화와 코로나 블루를 걱정하는 의견이 서로 나뉘고 있다.

코로나19는 인류의 가치관을 흔들 것이다. 근대 이래로 가치관의 기준이 되었던 성장과 효율 대신에 생명과 안전이라는 가치가 인류에게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과 효율의 가치관이 그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빠르게 팬데믹을 극복하고 경제 복구를 해야 한다는 희망은 성장과 효율의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치관 속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면 최상이겠지만, 과연 합의가 가능할까?

극단적 통제 속에서 방역에 성공한 중국과, 개방과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방역에 성공한 한국을 평가하는 세계의 눈은 분명 한국의 손을 들어주고 있지만, 빠른 방역의 성공과 경제 복구를 바라는 쪽에서는 중국식 모델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다. 빠른 회복과 재건을 원하는 목소리 속에서 경제대공황 직후에 나타났던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재출현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바로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고, 무엇이 궁극적 목적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서로가 같아지기는 어렵겠지만, 이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목표를 공유함으로써 공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기업과 노동자는 상대방의 위기를 서로 이해해야 한다. 대타협이 없다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는커녕 팬데믹으로부터의 복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자로서 한마디만 더 하고자 한다. 의대생들은 왜 국민들이 국가시험 거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물론 의대생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의료체제의 위기를 막기 위하여 대승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필요도 있지만. 위기가 파국으로 가지 않고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한발자국씩 물러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