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빈 교수](경제시평) 혼돈의 시대, 꼰대 경제학자로 남기(국민일보 20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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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경제시평] 혼돈의 시대, 꼰대 경제학자로 남기

바야흐로 우리는 혼돈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증폭된 경제정책 불확실성의 시기는 ‘뉴노멀 시대’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됐지만 실상은 그동안의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기를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가 유례없는 수준의 확장적인 통화 및 재정정책을 통해 돈을 찍어 쏟아부어도 경제성장률이 높아지지 않고 물가도 오르지 않으니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들을 바탕으로 강의를 진행하기 무색해진 시대는 이미 수년 전부터 도래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와 이에 대응하는 각국의 경제정책 전개 양상은 이러한 혼돈의 강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미국 및 유럽 중앙은행 등은 민간기업의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남아 있던 또 하나의 금기를 깨기에 이르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회복 과정에서 대규모 국채 매입을 통해 돈을 풀고 정부의 재정적자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이미 첫 번째 금기를 깬 덕분인지 별다른 논란 없이, 아니 오히려 난세를 극복할 과감한 결단으로 환영을 받으며 시행되고 있다.

서구 선진국의 주류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발전된 이론들을 바탕으로 신흥국가들에 그토록 교조적인 태도로 중앙은행 역할에 대한 정책 조언을 제공하던 것이 불과 십수년 전 일이다. 당시에는 환율 조작 혹은 정부 부채의 화폐화로 인한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이라는 미명하에 강하게 경고하던 사안들이 이제는 스스로의 위기 대응을 위한 무제한적 양적완화 정책으로 멋지게 업그레이드돼 찬사를 받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대가 격변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재난지원금과 같은 정부의 이전지출의 효율성에 대해 회의적인 주류 경제학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신흥국들에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들이 당장 위기가 닥치자마자 앞다퉈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는 상황 또한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발빠르고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경제위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미국에서 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 중 불과 15% 정도만이 지원금 전액을 지출했을 뿐 나머지 85%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저축하거나 빚을 갚는 데 썼다는 최근 서베이 연구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정책 결정에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했다는 해석이 마땅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면 생각도 변하기 마련이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상식도 자연히 변해간다. 변화된 시대에 부응하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역할도 변해갈 것이고, 정부의 바람직한 재정정책 운용 방향도 변해가는 게 순리일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상식이 자리잡은 지도 불과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과 30여년 전에는 각국의 부채비율 통계가 제대로 작성돼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건전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과거의 상식을 깨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새로운 상식들이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다.

내가 아는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꼰대가 돼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 재확산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경제 위축이 다시금 심화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에서 우리 정책 당국의 적극적 대응이 필수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중앙은행이 또다시 금기를 깨면서까지 민간시장 개입을 확대하거나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2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 된다면 차라리 당분간은 꼰대로 남는 편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