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록 교수](한반도24시)EPN 참여는 제2의 사드사태일까 (서울경제 20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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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미국파 경제학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미중 갈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명·청 교체기처럼 미국과 중국의 세력이 바뀌는 것이 아닌가.” 직설적이다. 우상이던 미국이 병들어도 저럴 수 있느냐였다. 국무부 차관이 중국의 한 업체를 배제하기 위한 경제번영네트워크(EPN·Economic Prosperity Network)를 제안하는가 하면 공직에서 막 물러난 존 볼턴의 회고록이 공개됐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이 얼마나 다급하면 자존심도 버리고 최하수를 두느냐는 게 핵심이었다.

지금은 명·청 교체기인 17세기 중엽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당시는 국경국가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하던 시기로 전쟁을 거쳐 승부를 내고야 말았다. 지금은 2차대전에서 경험한 가공할 핵무기의 트라우마가 있다. 강대국은 대리전이 아닌 직접적 대결은 공멸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반도가 대리전의 장소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70년 전의 국제정세와는 판이하다. 우리나라는 5,000만명 이상 인구 국가 중 1인당 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세계 7위 국가다. 북한은 잃을 게 없다. 그만큼 한반도가 대리전의 장소로 가기에는 미국이나 중국에 너무 큰 도박이다.

미국이 EPN을 제안한 것은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력 신장이 가공스럽다. 네트워크 사회에 필수적인 독자 위성항법장치(GPS) 시스템을 구축했다. 150인 이하 중국산 중형항공기가 오는 2021년부터 투입될 예정이다. 국제결제시장에서도 지난 2015년부터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의 기술 독과점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 화웨이가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본사가 포함된 선전에서 직접 실험하고 있다. 5G까지 주도하는 경우 아찔할 것이다. 미래 분야까지 입지가 흔들린다. 미국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 걸린 정치의 계절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주창하는 리쇼어링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는 없다. 중국이 세계 공급사슬에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단이었다. 세계적 다국적 업체들이 중국에서 철수하자 중급 기술이 그대로 중국에 이전됐다. 이를 계기로 중국 자체만으로 공급사슬을 구축할 수 있었다.

중국은 과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때처럼 한국의 행보에 관심이 높다. EPN에 들어간다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때처럼 한국을 억압할지 모른다. EPN 참여 제안은 불참기업에 대한 제재를 암시한다. EPN은 화웨이를 배제하자는 명시적인 조건이 있다. 배제를 명시하자면 더 큰 이익을 제시해야 한다. 명분도 중요하다. 강대국의 정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EPN은 배타적이다. 그만큼 실패 가능성이 높다. 기업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삼성이나 SK는 미국과 중국을 드나들며 문제 해결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할 것이다. 사드 사태 당시 문제가 됐던 롯데는 소비재 기업으로 중국과 손을 끊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삼성이나 SK는 다르다. 세계 일류 반도체 기업들과 손을 완전히 끊기가 쉽지 않다. 기업들도 생산 공장을 분산 배치할 수 있다.

지금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처럼 수요가 결정적 요소이다. 한계수요의 증가는 1인당 소득 1만달러를 갓 넘긴 중국이 더 빠르다. 중국의 진정한 발전은 지금부터다. 반면 미국은 성숙경제로 한계수요 증가가 제한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 6월 보고서는 세계 경제 성장률을 -4.9%로 전망한다. 중국만 유일한 1% 성장국이다. 잘 읽힌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 편에 서야 한다. 중국이 외관상 최대 수출국이다. 수출된 중간재가 가공돼 상당수가 미국으로 재수출된다. 실질적 최대 수출 국가는 아직 미국이다. 남북한 안보 문제도 미결이다. EPN에 동참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중국에 대해서는 다각적 설득이 필요하다. EPN은 사활이 걸린 안보 문제는 아니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Z47BLU7U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