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교수](6ㆍ25 한국전쟁 70년-박태균 특별기고) "개전부터 정전까지 ‘4번의 오판’…그사이 수백만명이 희생됐다" (한겨레 20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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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냉전시대의 역사는 한국전쟁으로부터 적절한 질문을 뽑아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저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 집중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붕괴되었고, 내부적으로 민주화를 성취하면서 1950년에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70년 전 발발했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교훈을 얻어내는 데 있어서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대 사명을 위해서는 70년간 끝나지 않고 있는 이 전쟁이 왜 발발하였으며, 왜 끝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야 한다.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의 적대적인 두 정부의 수립이 전쟁의 원인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1950년 당시 냉전의 최전선에 있었던 독일과 대만이 아닌 한반도에서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발했던 1968년, 그리고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판문점 도끼 사건이 발생했던 1975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쟁이 왜 1950년에는 발생했는가?

이 질문의 배경에는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몇달 전인 1950년 봄 모스크바에서 만난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한 가지 문제에 집착했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된다면 미국이 개입할 것인가? 그들은 동일한 대답을 했다.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핵무기 개발과 중국의 혁명 성공으로 인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한국과 같은 지역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의 계산과 결정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개전부터 정전까지 ‘4번의 오판’…그사이 수백만이 희생됐다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한 몇차례에 걸친 경고에도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은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시작했다. 당시 유엔군을 이끌고 있었던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은 중국군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전선에서는 중국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도, 본국 정부에서 중국군의 개입에도 미군이 승리할 수 있는가를 문의했을 때, 맥아더는 승리를 자신했다. 필리핀과 인천에서 승리를 경험한 그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다. 미군 장병들에게 “늦어도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그들이 간 곳은 집이 아니라 하늘나라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951년 6월의 시점에서 미·중 양국 정부는 어느 한쪽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에 인식을 공유했다. 제3차 대전의 발발을 원하지 않고 있었던 강대국들의 입장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판단은 적절한 것이었으며, 1951년 7월 개성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합리적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대국들은 전쟁이 계속되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쟁이 중단되거나 끝나더라도 상대방이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하도록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강대국들은 또 한번 오산과 오판에 빠졌다. 그리고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2년 동안 영화 <고지전>에서 잘 그려지고 있듯이 이 땅의 젊은이들은 군사분계선 근처의 산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마지막 실수는 정전협정의 체결이었다.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을 전제로 한 협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독일과 러시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1917년 혁명을 경험한 러시아는 더 이상 독일과 전쟁을 할 수 없어서 적대행위를 멈추기 위한 정전협정을 독일과 체결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맺어야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이탈리아와 독일이 패배하면서 연합국과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맺어진 정전협정은 곧 항복선언이었으며, 평화협정을 맺기 이전에 전투행위를 멈추기 위한 국가 간의 약속이었다.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서는 보상금 문제와 함께 패전국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협의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맺기 전 전투를 중지함으로써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전협정을 맺은 것이었다.

한반도의 상황은 달랐다. 어느 일방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이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전쟁의 당사자 사이에는 적대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전협정을 맺었기에 협정문 안에 90일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외국군의 철수를 논의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1954년 베트남 정전협정이 이후 20년 이상 전쟁의 시초가 되었다면, 1953년 한반도에서의 정전협정은 70년간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 열강들은 그저 전투행위를 멈추기만 하면 상대방이 전쟁으로부터 복구를 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혁명전략이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모두 이러한 오판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산과 오판은 단지 전쟁 자체의 피해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맹주 미국은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과 30년 동안 관계를 끊고 살아야 했고, 중국은 미국의 봉쇄 속에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심각한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고,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몇차례에 걸쳐 만났지만, 미-중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 발발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또 다른 전쟁을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이다.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방역에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개방성과 투명성이라는 민주주의적 절차의 원칙 위에서 시민사회와 정부의 협조적인 관계는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계산과 판단에서 언제든지 실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오산과 오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관동대지진은 그 대표적 경우였다. 당시 일본 사회는 재앙의 원인으로 재일 조선인들을 지목했다. 심각한 인종차별을 통한 타인화가 진행되었다. 단기적으로 사회적 관심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적대적 감정의 유산은 결국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코로나19의 재앙으로부터 채 벗어나기도 전에 한반도는 또 다른 긴장에 휩싸이고 있다. 만약 이 순간 1950년에 경험했던 또 다른 오산과 오판이 발생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한국전쟁 발발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확실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한국전쟁에서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듯이 전쟁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전쟁을 통해 남과 북에서 1인 집권이 확고해졌듯이 오로지 독재자의 권력을 강화해줄 따름이다. 모든 피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다. 어떠한 전쟁이나 충돌이 발생해서도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 위에서 더 이상 오산이나 오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오판을 할 여지를 주어서도 안 된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의 철수,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이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어떤 시그널을 주었을까?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지금, 상대방에게 오판의 명분을 줄 수 있는 조금의 허점도 보여서는 안 된다. 제발 잊지 말자. 그날의 비극이 왜 시작되었는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