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시론) 과거로 퇴행하는 한·일 관계, 더는 방치할 수 없다 (중앙일보 2019.4.1)


Publications by Faculties
2019-04-02

 [시론] 과거로 퇴행하는 한·일 관계, 더는 방치할 수 없다

한·일 관계 악화는 쌍방 과실이고 서로에게 손해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보상만 요구하는 한국도, 사과와 보상은 더는 못 하겠다는 일본도 역사의 포로다. 상대방을 비판할 줄만 알지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내동댕이치는 것도 서로 닮은꼴이다. 양국 관계는 전략적으로 방치되고 ‘무대책이 상책’인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할 때 한·일 관계는 ‘역사는 역사, 협력은 협력’이라는 투트랙 접근법을 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역사만 추궁하고 협력은 간데없다. 미래 지향적 관계 구축에 힘쓴다는 아름다운 수사는 어록에만 남아 있다. 반일 감정을 앞세워 정치적으로 단기 소득이 있는 ‘일본 때리기’만 보인다.
 
일본은 만만하게 두드리면서도 중국에는 낮은 자세로 일관하는 게 현재 모습이다. 한국에 경제 보복을 일삼는 중국에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국민이 미세먼지의 많은 부분이 중국에서 온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 이야기는 빼고 얘기한다. 미세먼지를 함께 해결하자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면박을 주는데도 반박하지 못한다.
 
‘일본쯤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판단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지 의아하다. 북핵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안보 위기가 올 때 미·일은 우리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이다. 만약 경제가 더 나빠져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일본은 한국의 안전판이다.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희망 고문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평화는 기적처럼 오지 않지만, 위기는 악몽처럼 다가올 수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목표를 추구해야 하지만, 어려운 때를 대비할 줄 아는 복안(複眼)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는 게 국민이 바라는 거라는 인식은 착각이다. 모든 한국인이 일본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니다. 2018년 만에도 754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관광을 다녀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한국에서 큰 인기가 있다. 기성세대의 감각으로 젊은 세대의 균형감을 무시하면 안 된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정치인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 가장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결국 죄 없는 국민만 억울하게 갈등의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일본이 원죄가 있고 잘못된 나라인데 밀어붙이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이고 국제사회에서 더 영향력이 있는 국가라는 사실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지만 힘을 키우지 않는 민족도 미래가 없다. 과거사에 집중하며 반일에 골몰할 게 아니라 일본보다 더 잘 살고, 힘이 있으며, 활력이 넘치는 나라로 키우는 길을 찾는 게 실사구시의 정치다.
 
외교는 상대가 있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미·중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일본과 척을 지는 게 우리에게 무슨 실익이 있나? 미·일이 앞장선 인도·태평양전략에서 한국의 중요성은 낮아지고 있다. 미·일이 우리를 절대 안 버릴 것이라는 바람은 지켜질 수 있나 곱씹어봐야 한다. 한반도에 우리 민족끼리의 평화만 오면, 동북아 정세를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지도 자문해 볼 때다. 한반도의 지정학을 보다 넓은 시야에서 둘러봐야 한다.
 
과거사가 한·일 관계의 전부가 아니다. 남을 욕하기에 앞서 우리를 돌아보고, 과거를 향해 뒤로 갈 게 아니라 미래의 힘을 키울 수 있어야 국민은 안심한다. 우리가 한·일 관계를 무시하고 방치하면서 일본에만 할 도리를 하라고 외치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서로 진지하게 소통하고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면서 실리를 모색하는 게 외교다. 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