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교수](아침을 열며)선거제도 개혁의 진정한 동력 (한국일보 20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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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선거제도 개혁의 진정한 동력

지난 15일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농성 중이던 손학규, 이정미 대표를 임종석 비서실장이 찾았다. 의원정수 확대를 포함해 국회가 구체적인 선거제도 개혁 방안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면 지지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했다. 뜻밖이었지만 그동안 진통을 겪던 연동형 비례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이 가시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합의는 다시 미궁에 빠진 것 같다. 야 3당은 득표율에 비해 적은 의석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1, 2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입장이 불분명하다. 한국당은 지난 합의는 말 그대로 연동형 비례제를 검토해 보겠다는 합의였지 도입하겠다는 합의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선거제도는 다양한 정치개혁 안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당내 의견분열이 봉합되었는지 의문이다. 이해찬 대표는 이미 오래 전에 연동형 비례제 수용 불가 입장을 내세운 적이 있다. 따라서 야 3당과의 공조에서 현재와 같이 수동적인 태도는 일시적이고 전략적인 협력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런 모습에 국민들은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왜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 왜 합의를 번복하고 상호 불신을 조장하는지도 의문이다. 잘은 몰라도 각자의 잇속 때문에 싸울 것이라는 의심이 팽배하다.

사실 현 상황은 이러한 상식적인 평가를 반박하기 힘들다.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논리가 의석 배분이라는 선거제도가 지닌 기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정당이 10%의 표를 받았으면 의석도 10%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대의(大義)로서는 충분치 않다.

우선 득표율을 그대로 의석률에 반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연동형 비례제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북유럽 국가들이 시행하는 순수 비례제를 도입하는 것이 현행 제도 아래서 작은 정당들이 입는 손해를 개선하기 쉽다. 연동형 비례제는 현행 제도보다는 비례성을 강화하겠지만, 초과 의석 문제나 부수적으로 고려되는 석패율제 도입 등으로 인해 비례성의 또 다른 왜곡을 내포한다. 더구나 연동형 비례제에 대한 독일의 경험을 고려할 때, 정당투표 비례제에 할당된 의석을 지금의 47석에서 획기적으로 증가하지 않고서는 효과가 미진할 것으로 보인다. 연동형 비례제만 대안으로 삼는, 더 설득력 있는 논거가 필요한 부분이다.

둘째, 사회적 가치로서의 비례성에 대한 정치권의 고민이 빈약하다. 대의(代議)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의 과정은 정치적 안정성과 비례성이라는 서로 상반된 가치에 대한 사회적 지향을 반영한다. 특히 비례성이라는 가치는 대의 정치의 과정이 사회 내 다양한 대안들의 경쟁을 보장하고, 각 대안들이 의회에 대표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 내 특정집단의 소외를 방지하고, 신속한 정책 결정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위한 비용을 치를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증진시킨다. 정치권이 초점을 두고 있는 득표율을 반영한 의석률은 이러한 비례성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왜 안정성보다는 비례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진단과 대국민 설득 과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치권의 노력은 미진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중대한 사회적 안건이 단순히 군소정당의 의석 늘리기와 주요 정당의 의석 지키기 간 대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엄중한 평가와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반영되지 않는 한 선거제도 개혁의 동력이 조만간 소진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