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교수](5공 전사 - 깊이 보기)(5)‘양복 입은’ 전두환 부각…국보위는 신군부의 정계 진출 발판 (경향신문 2018.12.12)


Publications by Faculties
2018-12-14

[5공 전사 - 깊이 보기](5)‘양복 입은’ 전두환 부각…국보위는 신군부의 정계 진출 발판

한정훈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보위는 불가피한 선택?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현판식 후 악수하는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오른쪽)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현판식 후 악수하는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오른쪽)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정화대상이 된 자는 법원 11명, 국회사무처 11명, 행정부 221명 등 총 243명으로써(…) 건국 이래 최대의 규모였다. …3급 이하 일반공무원은 전체 정원의 0.9% 정도에 해당하는 5247명을 숙정하였으며…”(<제5공화국 전사(前史)>, 1895~1897쪽). 국군보안사령부 등이 주도해 1982년 5월 완성된 <제5공화국 전사(前史)>(5공 전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의한 공무원 숙정 결과를 이같이 기록하고 있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고 평가하는 숙정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국보위의 활동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1980년 격변기 한국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국보위에 관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학계에서는 국보위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 연구논문을 찾아보기 힘들다. 겨우 한두 편의 서적만이 국보위를 유의미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강력한 권한 기구 ‘국보위’ 
1980년 5월31일~10월27일
대통령자문기구 명분 아래 
전두환이 상임위원장 맡아
공무원 숙정 등 전 분야 관여
 

국보위는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에 근거해 1980년 5월31일 비상계엄 아래서 대통령의 행정·입법 사무에 관한 자문을 위해 설치한 기구다. 말은 자문기구였으나 같은 해 10월27일 해체될 때까지 채 5개월이 안되는 동안 수행한 업무는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권한의 행사였다. 특히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취해진 조치들이었다.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을 앞세우고 신군부가 국보위를 통해 사회 전반을 관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국보위의 활동에 대한 논의는 시민사회 내에서도 미진하다. 국보위의 활동내용을 살펴보면 시민사회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다. 공무원 숙정작업 역시 객관적인 기준의 부재, 판단 자료의 편향 등으로 신군부가 사전에 준비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는 의문을 품기에 충분하다. 상당수의 고위 공무원이 여론재판에 가까운 평가를 통해 불명예 퇴진했을 가능성이 감지됨에도 불구, 그동안 이에 대한 문제 제기나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사회적 요구는 없었다. 

아마도 1900년대 중반 이후 격동기 한국 사회 내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이 국보위에 대한 관심이 미진한 이유는 자료와 기록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자료 부족만을 탓할 수는 없다. 동시대의 다른 사건들에 대해선 다수의 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12·12 사태부터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그리고 그 직후의 학생운동 등에 집중된 논의가 국보위에 대한 관심을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제5공화국>(조갑제 저)에서 신군부는 12·12 사태를 통해 실권을 잡고, 5·17 이후 국보위는 그러한 실권을 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조갑제의 해석 역시 국보위를 1980년 당시 중추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3김(三金)’의 회고록은 물론 동시대를 살았던 여러 정치인들의 회고록에서조차 국보위 활동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국보위에 대해 상대적으로 낮은 국민적 관심과 달리 흥미롭게도 <5공 전사>를 기록한 이들은 321쪽이라는 상당한 분량을 국보위 활동을 홍보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5공 전사> 제5편의 거의 전 분량이 국보위 활동에 대한 정당화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국보위 활동에 이 같은 적극적인 관심을 피력한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국보위 설치가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집권이 무너지면서 국가통치체제의 구심점이 상실되자 점차 심화 누적되어간 전반적인 정치, 경제 및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고 국가의 통치기능과 국기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5공 전사>, 1809쪽). “우리의 국기마저 흔들리게 한 광주사태와 같은 극도의 안보적 위기상황의 재발을 방지하는 한편, (…) 계엄당국과 행정부 간의 긴밀한 협조유지를 강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써”(1835쪽). <5공 전사>는 수차례 국보위 활동의 ‘불가피성’을 주장한다. “사실상의 군정 또는 5·16 후의 최고회의의 재판(再版)이라는 오해”(1839쪽)와 달리 “국가보위의 책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1841쪽)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신군부의 숨겨진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국보위가 고위 공무원 232명을 숙정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경향신문 1980년 7월10일자 지면.

국보위가 고위 공무원 232명을 숙정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경향신문 1980년 7월10일자 지면.

우선 사회의 긴급하고 불가피한 필요 때문에 설립된 기구라고 하기에는 그 역할이 전면적이고 포괄적이다. 제도적으로는 입법과 사법 부문에 대한 대통령자문기구였지만 실질적으로 국보위가 관여하지 않은 영역은 찾기 힘들다. 심지어 연락실을 운영해 계엄사가 관할하는 군 업무까지 일부 통제할 정도였다. 더구나 국보위의 활동은 매우 일사불란하고 전격적이며 조직적이었다. 공무원 숙정작업만 해도 설립 초기인 6월4일부터 시작된 일이 단 2개월도 안돼 행정·입법·사법부 내 5500명가량의 고위공무원을 해고하는 결과를 낳았다. 8월4일부터 시작된 사회악일소 특별조치는 단 11일 만에 전국적으로 총 3만578명을 검거했다. 경제적으로도 장기계획이 필수인 기업의 체질개선 및 투자 재조정이 순식간에 단행됐다. 

국보위가 단 5개월이라는 시간 내에 이뤄낸 이 같은 조치들은 민주화된 지금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힘들다. <5공 전사>에 자랑처럼 기술하고 있는 국보위 활동에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수렴 및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없다. 심지어 국보위 내부에서조차 활동 방향을 정하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고 보기 힘든 재빠른 행보였다. 오랫동안의 준비과정 없이 어떻게 이렇게 광범위한 일을 전광석화같이 처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인 것이다. 

그러면, 국보위는 불가피한 창설이었다는 주장과는 역설적으로 굳이 5개월 동안의 국보위 활동을 장황하게 홍보해야 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국보위에 대한 <5공 전사>의 설명과 국보위 활동시기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선 국보위 활동시기는 신군부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12·12 사태 이후 군인 신분으로 사회를 통제하던 상황에서 민간 정치인 신분으로 변경하기 이전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신군부가 추후 민간 정치인으로 성장해가기 위해서는 군인의 이미지를 벗어야 했던 시점이었다. 더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국민들의 예상을 넘어서야 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5공 전사>는 국보위와 관련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국보위는 조직적인 측면에서 민간 중심의 정부기구라는 점이다. 국보위는 국군기무사령부, 계엄사령부, 중앙정보부 등 기존 군 중심의 권력기관과는 달리 정부조직법 등의 절차에 따라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 등이 참여한 정부기구라는 것이다. 또 현역군인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위원장급 상부조직과 달리 분과위원회 등 세부 하위조직은 민간 공무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고위공무원 숙정의 임무를 담당했던 사회정화위원회의 경우 전국적으로 130만명이 넘는 엄청난 인원의 민간 공무원들이 참여한 것으로 분석된다(김행선, 2015). 

5공 전사, 장황한 국보위 홍보 
12·12 이후 군인 신분에서
민간 정치인 변신 꾀한 시기 
‘국가의 장래 맡겨 볼 만’ 등
전두환 이미지 틀잡기 시도
 

둘째, 국보위의 업적과 영향력을 과도하게 선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국보위의 활동을 전두환 상임위원장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5공 전사>의 국보위 활동 기록 후반에 집중된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설문조사와 결과 분석을 통해 국보위 활동의 긍정성과 그러한 역할을 주도한 핵심인물이 전두환 상임위원장이었다는 점을 선전하고 있다. 심지어 전두환 개인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대해 다분히 의도적인 새로운 틀짓기(framing)도 시도한다. “기존 지도자들에 비하여 신선감이 있어 국가의 장래를 맡겨 볼 만한 인물이다”(2085쪽)와 같은 설문을 통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12·12 사태와의 관련성은 은폐한 채 국보위 상임위원장이라는 역할에 기대 응답자들에게 긍정적 인식을 개발하고 있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대한 설문 내용을 담은 <5공 전사> 2085쪽.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대한 설문 내용을 담은 <5공 전사> 2085쪽.

이런 두 측면을 종합하면, <5공 전사>의 기록자들은 국보위 활동으로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서 군인 이미지를 벗겨낼 수 있는 역사적 의의를 발견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5·16 쿠데타와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온 신군부의 측면에서, 군 중심이 아닌 민(民)과 함께한다는 이미지 형성은 최종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요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전두환은 민간정부기구 리더일 뿐 아니라 당시 사회적 혼란을 해결한다는 목표를 훌륭히 완수해 낸 성공적 정치인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국보위 활동은 신군부가 정치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경우, 민과 군을 구분하려는 국민의 저항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는 정당화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5공 전사>가 국보위 활동을 강조한 이유가 국보위 창설의 불가피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추후 신군부의 정치 진출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사전 정당화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역사는 권력자에 의해 전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사회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거나 재평가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견지하지 못할 때, 역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미화로 점철될 수 있다. 1980년 당시 권력자에 대한 견제가 충분히 이뤄질 수 없는 공간에서 국보위 활동에 대한 평가가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5공 전사>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국보위 활동을 기구설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간과됐던 국보위 활동을 굳이 강조하고, 장황하게 기록한 이유를 주의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국보위 활동을 재평가할 수 있을 때, 그동안 간과되었던 국보위 활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구성하고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5공 전사>를 주목하는 이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120600045&code=940100#csidx241ed0b653eb5b88b3b7cdf64a7309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