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교수](정동칼럼) 대학이 보수화되면 생명을 잃는다 (경향신문 2018.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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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정동칼럼]대학이 보수화되면 생명을 잃는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 : 2018.08.23 20:11:02 수정 : 2018.08.23 20:20:04

대학은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대학은 자유의 최후 보루로서 국가폭력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곳이다. 당시의 지식인을 대표했던 대학생과 교수들이 모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대학에서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정동칼럼]대학이 보수화되면 생명을 잃는다

세상은 바뀌었고,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폭력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있다. 아직도 가끔씩 고개를 쳐드는 국가폭력의 유령이 어른거리기는 하지만 이제 대학에서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가 국가적 이슈가 되는 시대는 아니다. 오히려 갑질과 성희롱 등 다른 직장에서의 폭력과도 닮아가는, 대학 내부의 생활폭력으로부터의 자유가 문제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의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지나간 시대의 문제인 것인가? 과연 우리 대학은 쟁취한 자유를 가지고 마음껏 대학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자들은 치열하게 논리를 세우고 검증을 하지만 새로운 영역을 자유롭게 개척하고 새로운 발견에 가슴 뛰고, 새로운 대안과 상상을 제시하는 자유로운 지적 탐험을 즐기고 있는가? 그를 위해 교수들은 학생들과 지적인 대화와 토론을 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학자들의 비판과 창의적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캠퍼스 문화와 지식인 문화를 만들어 왔는가? 지금 우리 대학에서의 시간은 일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지적 탐구와 상상력과 낭만의 시간인가? 과연 우리 대학은 사상과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여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물론 민주화투쟁 시기의 대학과 지금의 대학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때와 달리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국가적 폭력을 상시적·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또한 그때와 다르게 대학의 수업도 비교적 성실히 진행되고 있고, 못 구하는 교재와 논문도 거의 없다. 교수들도 정년보장과 승진을 위해 수많은 논문을 매년 쏟아내고, 여기저기에 자유롭게 기고하고 출연을 하면서 다양한 대상을 향하여 솔직한 의견을 제시하고 비판을 날리기도 한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하지만 대학은 이제 당연시된 사상과 학문의 자유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건 바로 학문의 자유 속에서 시대의 고민을 가장 먼저 머리와 가슴으로 끌어안고, 시대를 선도해야 하는 대학이 그 시대 안에서 매몰·침몰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대학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교수들이, 자본주의사회의 단순한 생업종사자가 되면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문제에 당면하여 자유롭게 새로운 지적 실험을 하기보다는 생활영위를 위하여 기계적으로 일하면서 월급받는 보통의 월급쟁이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 현실은 새로움과 창의성과 실험정신이 사라진 대학과 대학원의 강의실과 연구실, 그리고 심사자 이외에는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기계적인 논문들, 대학 강의와 전공과 상관없이 취직에만 골몰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안을 아직도 외국의 유명 스타 학자에게만 의존하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다. TV나 인터넷의 인문학 강좌나 통찰을 얘기하는 강의를 들어봐도 시대를 선도하는 독창적인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흥미 위주의 역사 이야기나 외국 것에 대한 소개, 아니면 역경을 극복한 체험담 위주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문제, 특히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나타나는 제반 문제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지적 터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대안 담론을 모색하는 지식세계가 사라지고 있다. 

인문사회 쪽에서는 언젠가부터 구조적 변화를 보는 거대담론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거대한 변화를 읽어내는 지적 풍토가 사라지고 대학이나 학계는 테크니컬한 문제만 다루는 기술자의 학계로 보수화되기 시작하였다. 자유로운 지적 탐구의 대학이 기계적 논문생산의 대학으로 변해왔다. 아직도 대학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자유로운 곳이어야 한다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학과 출퇴근의 자유가 아닌, 자유로운 지적 실험과 자극과 시대를 선도하는 대안을 연구하는 자유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학은 충분히 진보적이지 못하고, 충분히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래서 죽어간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32011025&code=990308#csidxeb91141d9c6c501a543e169cdec9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