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 교수] (HERI의 눈)대한민국 국제개발협력을 위한 '변명' (한겨레 201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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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3

대한민국 국제개발협력을 위한 ‘변명’

등록 :2018-03-12 18:21수정 :2018-03-13 10:12

【HERI의 눈】
한,중,일 개발협력에 드리운 ‘개발지상주의’ 그림자
원조규모 작은 한국은 중,일 따라가면 존재감 상실
민주화, 경제발전 경험 배합한 북유럽 모델 참고할 때

지난달 2일 코이카는 외부 전문가 중심의 ‘코이카 혁신위원회’가 내놓은 신뢰회복 혁신안을 발표했다. 혁신안에는 △해외 사무소장과 감사실장 등 보직자의 개방형 직위제 10% 달성 △노동이사제 도입 △개발협력 효과성 제고 전담 조직 신설 △공적 개발원조(ODA) 사업의 심사·선정의 독립성 강화 등이 포함됐다. 연합뉴스

지난달 2일 코이카는 외부 전문가 중심의 ‘코이카 혁신위원회’가 내놓은 신뢰회복 혁신안을 발표했다. 혁신안에는 △해외 사무소장과 감사실장 등 보직자의 개방형 직위제 10% 달성 △노동이사제 도입 △개발협력 효과성 제고 전담 조직 신설 △공적 개발원조(ODA) 사업의 심사·선정의 독립성 강화 등이 포함됐다. 연합뉴스

장 폴 사르트르는 일찍이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중간자로서 지식인의 위치를 설정하고 그 애매함에서 오는 딜레마와 위험을 경고하였다. 지배계급에 의해 지배 수단으로 전락하면 지식인은 어느 순간 지식전문가라는 ‘괴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 주체로서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고 피지배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회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면 진정한 지식인으로 부활할 수 있다.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뀐 최초의 국가다. 신흥 공여국으로 떠오른 한국은 선진 공여국과 개도국 사이에 모호하게 자리 잡은 국제원조사회의 지식인과 흡사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었음에도, 빠르게 경제를 발전시키고 정치 민주화까지 이룩한 한국은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근대화의 성공사례일 것이다. 이렇게 응축된 근대화 경험 때문에 북반구의 선진국들은 한국을 근대화 교본으로 홍보한다. 이를 통해 중심부 국가들의 지식전문가로서 개발지식을 개도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국에 기대하고 있다. 반면, 남반구의 개도국들은 강대국 중심의 세계체제에서 급격한 근대화에 성공한 근사한 비밀을 배우려 한국의 지식공유를 기대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등 선진 공여국은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불편한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개도국은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선진 공여국의 원조가 필요하다. 이렇게 단순한 일차적 대척점보다 현재 개발원조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개발원조 예산 삭감, 브렉시트 이후 영국 메이 행정부의 국익 중심의 원조정책으로 회귀, 일대일로로 표현되는 중국 시진핑 정부의 대국굴기, 일본 아베 정부의 대중국 봉쇄정책으로 공적개발원조 활용 등에서 우리는 주요 원조행위자가 모두 자국의 이익추구에 개발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진 공여국과 개도국 간의 복잡한 대척점에서 한국의 위치설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독이 될 수 있다. 국제개발의 중간자로서 개도국의 입장과 선진 공여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현재 혼란한 국제관계에서 개발협력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위치설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식인으로서의 위치설정은 결코 한국의 국익과 동떨어질 수 없으며,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 측면에서 이는 한국에 중요한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경험을 살리되 선진 공여국과 우리나라가 용인해왔던 개발지상주의, 공여국의 국익을 위해 원조를 이용하는 악습과 결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현 문재인 정부의 개발협력 개혁, 그리고 대한민국의 개발협력에 대한 철학적 로드맵 작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공여국 이익 중심의 이기적 원조 벗어나 받는 나라 존중을

국제원조 사회의 중간자로서의 위치설정은 동북아시아라는 특유의 지역적 맥락에서 시작할 수 있다. 동북아에서 국제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가는 일본, 중국, 한국인데 세 공여국의 개발원조 정책에는 공통 특징이 있다. ‘발전국가’로 표현되는, 경제발전을 빠르게 성공적으로 이룬 경험을 공유하며 이 경제성장 신화의 뒤안길에는 늘 개발지상주의로 점철된 불편한 진실이 녹아있다는 점이다. 개발지상주의는 한중일 삼국의 개발협력 정책에 반영되어 있다. 삼국 모두 예외 없이 높은 유상원조 비율과 낮은 비구속성원조 비율을 고수한다는 점이 대표적인데, 개도국들이 동북아 발전국가로부터 얻고자 하는 개발 노하우가 인권과 자유가 희생된 개발지상주의가 아닐 것이다. 공여국의 기업이 진출하는 교두보로 개발원조를 활용하는 이기주의적 원조도 아니다.

다행히 한국은 일본, 중국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한국에는 1987년 민주화와 2017년 촛불 혁명을 국민의 손으로 끌어낸 소중한 경험이 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공적개발원조 예산 규모가 일본과 중국보다 현격히 작다는 점도 차별성이다. 개도국들은 일본과 중국과 유사한 방식의 개발원조를 작은 규모로 투입하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에 매력을 느낄 이유가 없다. 이왕이면 많은 원조를 주는 중국과 일본의 입맛에 맞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산 규모가 작기에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경험을 잘 배합하여 한국적 개발원조 모델을 설계할 가능성이 생긴다. 다시 말해, 유상원조가 아닌 무상원조를, 구속성 원조가 아닌 비구속성 원조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또 식민주의와 개발지상주의를 극복하는 모습을 개도국에 보여주고 기존 국제개발체제에도 각인시켜 한국의 개발원조는 중국과 일본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일본과 중국 모두 개발원조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혈안이 된 현 상황이 한국에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비록 작은 규모의 원조이지만 인도주의적 원칙과 개도국 입장을 존중하는 원조로 상호 간의 연대를 강화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과 유사한 방식의 개발주의 원조정책을 고집한다면 한국은 영영 두 이웃 나라에 묻혀 버릴 것이다.

인도주의에 입각해 개발협력 새모델 제시한 북유럽 참고해야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이미 북유럽 국가들에 의해 증명이 되었던 방식을 아시아 맥락에 도입하자는 것이다. 아마도 인도주의적 원조로 유명한 북유럽 모델을 한국이 차용해 국제적으로 모범이 되는 개발원조 정책을 추진하자는 주장이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한국을 아시아의 북유럽 모델로 전환하는 차별화 전략은 북유럽 국가들이 왜 인도주의에 입각한 개발협력을 고수했는가에 대한 이유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북유럽 국가들이 태생적으로 인도주의와 인권,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모든 정책의 기조로 인도주의를 적용하고 있다고 답하는 순진한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인도주의적 원조는 이들에게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고육책이었다.

러시아, 독일, 영국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북유럽 국가들은 오랜 기간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20세기 초반만 해도 주권국가로서 공인받기 어려웠다. 그러다 유전에서 나오는 경제성장 동력과 성숙한 복지국가 및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북유럽 특유의 인도주의적 개발원조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 공여국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 인도주의적 국익 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북유럽을 국제개발규범의 모범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북유럽화는 국제원조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발 담론을 개도국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구성하는 중간자적 위치와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이러한 개발지상주의의 극복은 한국이 추진해 나갈 개발협력의 미래상과 연결된다. 국제사회에서 개발협력의 진정한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개발협력 생태계를 개혁하고, 개발주의에 물든 정책을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코리아 에이드(Korea Aid)’를 쇄신하려는 노력이 문재인 정부에서 나름 탄력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미경 코이카 신임 이사장이 추진하고 있는 내부 혁신안에서 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과 쇄신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고 사람을 바꾼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장기적 로드맵과 이를 일관되게 뒷받침해 주는 한국 개발원조의 철학과 원칙이 국민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확립되어야 한다. 큰 그림의 원조철학에 따라 개혁이 신바람을 얻어야 하며, 개혁의 원칙이 공유되어야 지속 가능해진다. 개발지상주의를 극복하는 원조철학에 무상원조와 비구속성원조의 중심성, 장기적 국익으로서 원조의 소프트 파워,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연대의식이 중요한 개혁 코드로 부각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이 국제원조 무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한국을 안착시킬 수 있는 진정한 노력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김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oxonian07@snu.ac.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35724.html#csidx11bb4276146b307b6afa15fbee170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