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시론) 전략 없는 감성 외교, 자충수일 뿐 (조선일보 201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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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우리 외교가 리더십 부재 상태에서 '복합 위기'에 빠졌다. 북한의 위협은 점증하는데, 미국은 동맹 재조정을 요구할 기색이고, 중국은 사드로 우리를 압박하고, 일본은 소녀상 철거를 내세우며 외교 강수를 빼들었다. 주변 강국들은 트럼프, 아베, 시진핑, 푸틴 등 강력한 지도자를 앞세우며 '강한 나라의 부활'을 외치는데, 우리는 정치적 혼돈과 분열 속에 자충수만 두고 있다.

위기일수록 방향타를 꼭 쥐고 외교안보의 기본을 재확인해야 한다. 미국의 안보 담보가 없으면 한국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어 있다. 사드 배치를 미룰 수 없는 이유다. 중국의 압력에 굴복해 사드 배치를 미루면 앞으로 중국발 압력의 파고는 오히려 높아만 갈 것이다. 사드 배치가 북핵에 대한 방어적 대응 조치였다는 그간의 주장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북한의 창은 날카로워지는데, 한국은 방패를 내려놓는 형국이 된다.

중국이 북한을 움직이는 지렛대는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를 담보해줄 국가는 아니다. 한·미·일 공조는 북핵 대응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 한·일 간의 협력은 한·미·일 공조를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이다. 한·일 양국 갈등을 조장하는 어떠한 시도도 궁극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약화시켜 대북 공조 균열이란 결과를 가져온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양국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합의 내용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걷어차고 재협상하자는 주장은 감성적 호소력은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약하다. 외교에는 상대가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종적 해결'이라고 정의하고서 합의에 다시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상황 변경에 의한 재협상 요구는 '한국은 필요하면 골대를 옮기고 재협상을 요구한다'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한국의 국제 신용도는 떨어지고 국제사회의 비난은 한국을 향할 공산이 크다.

한국 시민단체는 일본의 성의 없는 사과에 항의해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했다지만, 국제사회는 '상대국 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지킬 책무'를 규정한 빈 조약 22조와 상치되는 이 같은 조형물 설치에 비판적이다. '국민 정서가 우호적이면 국제협약도 무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끼리만 통용되는 논리다. 정치인들은 이런 감성에 너무 쉽게 편승한다. 만에 하나 일본과 재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기존 합의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음 정권에 큰 짐이 될 것이다. 합의 당시 46명의 생존자 중 34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이미 합의 결과를 수용했다는 점도 재협상론자들에겐 깔끄러운 부담이다.

일본도 자제해야 한다. '일본은 한·일 합의에 따라 10억엔을 출연했으니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합의의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10억엔은 소녀상 철거 대가나 선금 지불이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정책 조치였다. 금전적 보상이 사과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사죄의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으려면 일본은 10억엔 갹출과 소녀상 이전을 직접 연계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정부도 일본 공관 앞의 소녀상 추가 설치를 방치해 일본의 여론을 자극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