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정동칼럼) 신뢰 프로세스만으론 부족하다 (경향신문 201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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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4

[정동칼럼]신뢰 프로세스만으론 부족하다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싱크탱크 미래지원장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적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적과 신뢰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적은 신뢰할 대상이 아니라 항복을 받아낼 대상이기 때문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가면 적은 이 세상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이제 이와 반대로 나는 친구와 신뢰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역시 분명하게 “그렇다”이다. 나는 친구와 신뢰를 쌓아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친구와 신뢰를 쌓을 수는 있지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친구도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 그가 조속한 시일 내에 꼭 갚겠다는 말을 우리가 항상 믿는 것은 아니다. 이건 무얼 의미하냐면 친구관계는 신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논의를 남북한 관계로 옮겨보자. 현재 남한과 북한 사이는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있는 적대관계이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이나 평화체제로 전환되지 않은 적대적 관계이다. 우리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남북한이 서로 주적이라고 보는 상황에서 신뢰를 쌓는 것은 물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이 불가능에 가깝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신뢰 프로세스 혹은 더 넓은 범주의 신뢰외교(trustpolitik)에 보완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남북 간에 교류와 협력이 깊어지기 전에 서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백번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뢰가 있을 때 교류와 협력이 배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실컷 주고 뺨 맞으면 국내 여론이 들끓을 것이고 북한은 되돌려주는 것 없이 군사적으로 강해진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실제로 우리의 적을 강하게 만들기만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북한 간에 신뢰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신뢰 프로세스가 가능하려면 둘의 관계가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어야 한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는 서로 신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항복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공히 서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할 의지와 계획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적대관계 속에서는 남이나 북이나 신뢰라는 이름으로 들고 나오는 정책의 뒤에 항복문서를 요구하는 음모가 깔려 있다는 의심이 계속 자리 잡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결론은 무엇일까? 남북한 관계의 발전 혹은 북한 문제의 해결은 신뢰 프로세스와 화해 프로세스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박근혜 정부가 주장하는 신뢰외교와 함께 상호간에 적이라는 정체성을 친구라는 정체성으로 바꾸는 화해외교(identitypolitik)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바꾸는 정체성 프로세스만으로는 남한은 북한에 속을 수 있고, 신뢰만을 쌓기 위해 계속 검증하는 신뢰 프로세스는 정체성 프로세스가 없으면 처음부터 미완성으로 끝나는 운명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지난 진보정부와 보수정부의 정책 경험을 통해 잘 증명되고 있다. 대북관계에서 진보정부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화해외교에 주로 방점을 찍어 신뢰 프로세스가 약했고, 검증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신뢰 프로세스를 강조했지만 정체성을 바꾸는 정체성 프로세스(identitypolitik) 혹은 화해협력 프로세스를 상대적으로 도외시했다.

결과적으로 두 정부 모두 절름발이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진전 없이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 관계는 두 발로 걸어가야 한다. 신뢰 프로세스나 화해 프로세스를 다 걸어야 한다. 둘 중 한쪽으로만 걸어가면 도중에 넘어지게 된다. 현 정부에서건 아니면 다음 정부에서건 진정으로 남북한 관계를 발전시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신뢰 프로세스와 화해 프로세스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신뢰외교와 정체성 외교를 융합한 새로운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