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섭 교수](경제시평-김종섭) 처치곤란한 흰 코끼리 (국민일보 20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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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0

[경제시평-김종섭] 처치 곤란한 흰 코끼리

2012.08.28 18:12

흰 코끼리는 불교에서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처치 곤란한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태국의 설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대 국왕이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신하에게 흰 코끼리를 선물했던 것이 유래라고 전해진다.

신하 입장에서는 국왕이 선물한 신성한 코끼리가 죽게 되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코끼리가 자연사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열과 성을 다해 키울 수밖에 없는데, 코끼리는 평균 수명이 70년이고 하루 180∼270㎏의 먹이를 먹는 대식가이기 때문에 신하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흰 코끼리의 의미는 대외원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어느 시골 보건소에 가면 첨단 초음파 진단기와 수술 기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를 사용할 줄 아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먼지만 쌓여가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니카라과의 작은 어촌 마을에 가면 직업훈련소에 전자제어식 첨단 산업기기 수십 대를 교육용으로 갖다 놓았다. 그러나 어촌 마을에 그런 기술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없기 때문에 포장도 안 뜯은 채 애물단지가 되어 가고 있다. 이 모두 한국이 원조의 일환으로 제공한 물건들이다.

비슷한 예는 수없이 많다.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첨단 교실을 저개발국에 제공한 경우도 있다. 망가질까 봐 어린 학생들에게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자물쇠를 걸어두어 유지하는 비용만 소요되고 있다. 물론 모든 원조가 이렇게 허술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임은 공여국과 수원국 양쪽에 있을 것이다. 공여국 입장에서는 수원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고 자신이 잘 만드는 물건을 주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자국 산업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수원국의 입장에서는 자국 국민이 필요한 물건보다 소수 몇 사람이 원하는 물건을 요청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고, 수원국 담당자들이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엉뚱한 물건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인 원칙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원조에 대한 국제적 원칙 중에 ‘주인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원조를 제공할 경우 수원국의 주도 하에 원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원국이야말로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느 지역의 어느 집단에 필요한지 가장 정확하게 알 것이기 때문에 수원국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수원국이 ‘주인의식’을 갖고 원조에 관한 주요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원국에게 제일 좋은 결정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수없이 발생한다.

그동안 막대한 금액의 원조가 수원국의 경제발전과 빈곤감축에 큰 효과가 없었던 이유 중에는 수원국의 부패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부패가 만연해 있을 경우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적인 원칙을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한국은 이제 신흥 원조 공여국으로 부상하여 여러 공여국과 수원국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 원조 금액이 정체되어 있고 원조의 효과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새롭게 원조금액이 증가할 국가이며 새로운 방법으로 원조를 제공할 국가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기존의 정립된 국제적 원칙과 표준에 따라 원조를 제공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한국적 원조 방식을 개발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국제적인 원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연구를 통하여 선별적으로 또는 보완해서 국제표준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김종섭 (서울대 교수 국제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