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아침을 열며) 경제민주화가 새로운 시대정신? (한국일보 201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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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1

 [아침을 열며/5월 31일] 경제민주화가 새로운 시대정신?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시간 : 2012.05.30 21:03:21

요즘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가 아마도 '경제민주화'가 아닐까 싶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대정신을 선점해 끌고 나가는 당과 정치인이 2013년 청와대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주요 정당과 정치인들은 시대정신을 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포착해 이를 대선 공약에 반영시키려고 한다. 경제민주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의 후보 중 하나로 등장한 배경에는 이른바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 세금인하 등으로 대변되는 지난 정부들의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부작용이 있다. 즉 경제의 양극화와 높은 청년실업률, 대기업 경제집중 등의 부작용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제기된 화두가 바로 경제민주화인 것이다.

200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사실 경제 양극화와 금융자본 및 외국자본 횡포의 주범으로 비판받기 시작한지 꽤 오래됐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수잔 스트랭은 이미 1986년에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책을 출판했고, 정치경제학계에서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지 오래됐다. '자본주의 다양성' 논쟁이라는 학계의 논쟁에서도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가 국가의 시장개입이 강한 북유럽 경제에 비해 반드시 그 성과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경험적 데이터가 무수히 제시됐고,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경제 및 사회의 양극화를 가져온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최근에는 폴 크루그먼이나 조셉 스티글리츠와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도 신자유주의 비판에 가세하고 있다.

이러한 꽤나 오래된 흐름 속에서 볼 때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적인 747 공약이나 '줄푸세' 공약을 내세운 한나라당의 공약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읽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공상을 심어준 신자유주의의 상투를 잡은 공약이었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본격화된 세계 금융위기는 이제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고, 한국에도 그 여파가 미치자 정치인들은 대안으로서 새로운 시대정신과 묘약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짚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경제민주화'라는 화두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반영한 올바른 방향의 화두인가라는 점이다.

민주화라는 단어는 한때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한 시대정신이었고 정치발전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다. 권위주의 독재를 극복해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표현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고 따라서 정치 영역에서 민주화가 의미하는 내용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영역의 개념인 민주화라는 단어가 경제의 영역에서 사용되다 보니 그 내용이 매우 불분명해 진다. 경제에 권위주의 독재가 있고 이를 민주화하자는 말 같이 들리는데, 경제의 권위주의 독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권위주의적 기업운영과 경제운용이 경제에 꼭 나쁜 것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무작정 경제민주화라고 하니 민주화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원래 경제민주화는 헌법 119조 2항에 이미 나오는 표현이어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공정한 성장 및 분배를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목표도 경제민주화와 다름이 없다. 다만 그 목표를 위하여 국가가 아닌 시장에 경제를 맡기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고 결과가 반대로 나왔을 뿐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제시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공자말씀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어떠한 경제 운영의 모델이 경제민주화를 가져오는가를 놓고 대안을 선점해 정당 간에 경쟁을 하는 것이 옳다. 그러한 경쟁이 없고 모두가 지당한 경제 민주화만을 얘기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여당이나 야당이 서로 무엇이 다른지 누가 더 시대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민주화라는 단어가 경제를 정치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