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민족주의의 도미노가 몰려온다(한국일보 201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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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7

 [아침을 열며/2월 16일] 민족주의의 도미노가 몰려온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연두교서가 한국 시간으로 1월 25일에 있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항상 한국 언론과 정계, 재계의 큰 관심을 모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올해는 그 중요도에 비해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연두교서의 내용은 가볍게 지나칠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앞길에 펼쳐질 험난한 국제환경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 도미노의 가능성이다.

이번 미 대통령 연두교서의 내용 중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글로벌한 사고에서 자국중심적인 사고로 전환한 미국이다. 이는 특히 경제와 에너지 정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투자를 확대하는 기업에 대해선 매우 우호적인 세제혜택을 주지만, 미국의 고용을 외국으로 아웃소싱하는 기업에 대하여는 적대적인 의견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자, 특히 하이테크 제조업자에 대해서도 세제혜택이라는 인센티브를 제시하면서 미국제조업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무역과 관련해서는 공격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할 의지를 드러냈고, 또한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수입 상품에 대해서 매우 까다로운 규정과 감시를 도입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고숙련 미국 노동자를 포함한 미국의 인적자원을 양성하고 개발하는데 역점을 기울이며, 미국 안에서의 혁신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거기다 미국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여나가겠다는 의지도 역시 발표했다.

이러한 내용은 얼핏 보면 대통령이 자신의 국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같이 상식적으로 읽히지만, 사실 글로벌 시각을 앞세우던 미국이 대단히 민족주의적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내용이다. 미국 기업 우선주의이고, 미국 기술과 제조업 우선주의이며, 해외시장에서 미국 상품 우선주의이다. 그리고 에너지 면에서도 외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것은 타국과의 상호의존을 줄여나가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미국의 민족주의적인 경제정책은 앞으로 경제면에서 상대국의 민족주의적인 대응으로 이어지겠지만 이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 미국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문제이다. 미국은 이미 심각한 경제위기로 인해 향후 10년 간 적게는 4,500억 달러에서 많게는 1조 달러에 달하는 국방비를 삭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렇게 삭감된 국방비의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동맹국의 부담으로 넘어올 것인데, 그렇게 되면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존재감을 동맹국이 돈을 내며 살려주는 모양새가 된다. 이는 동맹국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한다.

이 같은 미국의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은 앞으로 한국의 민족주의와 충돌할 것이다. 특히 향후 한국의 정국이 한미 FTA 재협상 및 폐기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달아오르고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국과 미국은 상호간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충돌이 한미관계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세계 경제가 하강하면서 한국의 주변국들은 모두 민족주의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모두 글로벌 리더십을 피하면서 몸을 사리고 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일본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할 것이며, 중국의 경기하강 역시 민족주의의 암운을 드리운다. 거기다 세계의 리더인 미국이 민족주의적인 자국중심주의로 회귀하면 다른 국가들의 연쇄적인 민족주의적 대응이 불 보듯 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무작정 미국만을 믿고 의지하는 외교 전략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민족주의에 뒤통수를 맞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족주의에 반감을 갖는 다른 국가들에게서도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다. 다가오는 민족주의의 태풍을 한국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이제는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위기 시 의지할 수 있는 국가 안전망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 답은 바로 강화된 동아시아 지역협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