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新봉건사회 맞서는 21세기 부르주아지가 탄생하다(프레시안 20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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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新봉건사회 맞서는 21세기 부르주아지가 탄생하다
[이근 칼럼] 2040 세대와 테크놀러주아지 <中>
기사입력 2011-11-07 오전 11:34:21
          

2040 세대, 일시적 현상인가?

2040 세대의 정체성에 관해 요즘 상당히 논란이 많은 듯하다. <프레시안>에서도 2040 세대가 계급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여당과 야당 모두 선거에서 확인한 2040 세대의 위력 때문에 이들이 누구이며, 이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에 대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역시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뭔가를 보여 주어야 정신을 차린다.

2040 세대의 최근 투표 성향을 보면 지속적으로 반(反)한나라당 성향의 투표가 60%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경남지사,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나타났고,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386이라고 할 수 있는 40대의 반 한나라당 성향은 2030에 비해 비교적 낮게 나타나고 있지만 대략 50%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반 여당 성향은 여당이 정치를 잘 못하면 당연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것이 세대별로 너무나 뚜렷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세대적 현상이다. 아무리 얼토당토하지 않은 사건과 정책이 터져 나와도 50대 이상의 한나라당 지지는 실로 경이롭기만 하다.

하지만 젊은 세대 특히 2040 세대가 반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바로 진보세력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도 이분법의 덫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실 근대화와 민주화의 시대가 지난 이 시대에 진보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필자는 2040 세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규정짓는 매일의 경험에서 공통의 경험, 성향, 정체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며 그 경험을 만들어 내는 기저에는 이들이 공통으로 소유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 계급적 성격이 이들의 투표 성향을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며, 결국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아주 젊은 세대는 386에 대해 일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변혁에 관심이 많고 인구적으로도 가장 큰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386 세대가 2030과 동일한 계급적 성향을 가지게 되면 2040 세대는 더욱 큰 위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386 세대가 단순한 물질적 욕망에 따라 한나라당과 비 한나라당 사이에서 스윙(말을 갈아타는 것)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386이 점점 2040의 세대적 계급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040 세대'의 계급적 성향 : 테크놀러주아지

2040 세대는 투표가 가능한 젊은 세대를 의미한다. 투표가 가능하지 않은 10대까지 포함한다 해도 아마 1040 세대의 성향은 비슷하게 나오리라 짐작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매우 본질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시장 경제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21세기의 생산수단을 그 누구보다도, 특히 윗세대와 비교할 때 상대가 안 되게 능숙하게 다루고 또 비교적 용이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1040 세대는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과 기기 및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이 생산수단을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소형화된 컴퓨터는 한국에서 386이라고 불리는 세대가 한창 공부하고 배우고 통신할 때 PC의 형태로 비교적 값싸게 보편화되었고, 그래서 현재 40대 이하의 세대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기계이다. 그 윗세대는 컴퓨터를 새로 배울 시간과 절실한 필요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형태의 작업 습관에 익숙해져 있어서 컴퓨터는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통신 기기의 소형화 추세다. 소형화는 정보통신의 경험 세계를 그야말로 일상화하기 위해서 등장한 추세이지만, 즉 하루 종일 매일같이 곁에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등장한 추세이지만, 본의 아니게 나이든 세대를 더욱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아주 단순한 이유인데, 나이가 들 수록 작은 글자나 기기가 잘 안보이기 때문이다.

작은 스마트폰이나 작은 노트북 화면은 이들 윗세대에게는 여간 불편한 기기가 아닐 수 없다. 윗세대는 정보통신의 경험 세계를 젊은 세대와 같이 일상화할 수 없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신문을 보고, TV 뉴스를 보아야 한다. 전화도 용건만 간단히 통화하는 수단이다. 기기의 생소함에 기기의 불편함이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1040 세대는 현재 지식정보 상품이 주요한 상품이 되는 21세기 자본주의경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생산수단인 정보통신 기기를 소유하고 또 이를 잘 다루는 고전적 의미의 부르주아지이다. 과거의 부르주아지는 대형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수단을 잘 사용하도록 관리하는 관리형 부르주아지였다면, 지금의 1040 부르주아지는 소형화된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고 자기가 직접 상품을 생산해 낼 수도 있고, 또 고용당할 수도 있고, 또 고용을 할 수도 있는 매우 독특한 부르주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필자는 과거의 관리형 부르주아지와 구별하여 테크놀러주아지(테크놀로지 + 부르주아지, 이하 "테크놀"로 부름)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테크놀들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지이다. 이들이 북한과 같은 봉건적 신분사회를 옹호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테크놀들은 민주주의 세력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민주화를 이끈 40세대에서부터 시작해 민주주의와 다양성, 활력있고 자유로운 정보통신의 시대와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1030세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리타분한 지역주의의 정치와 권위주의적 정치, 세련된 문화가 없는 막무가내의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 물론 대안이 없는 경우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거나 아예 선택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융합생산수단과 1040 테크놀의 특징

1040 테크놀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은 과거의 생산수단과 달리 매우 독특한 특성을 지닌 생산수단이다. 필자는 이 생산수단을 융합생산수단이라고 개념화한다. 융합생산수단은 기본적으로 상품을 생산해 내는 생산수단이지만, 이 생산수단을 통해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도 하고, 유통도 하고, 공부도 하고, 놀이도 하고, 사진을 찍고 영화도 만들고, 문화적 활동도 하고, 주식 투자도 하고, 정보를 획득 교환하고,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상담도 하고, 항의도 하고, 정치적인 참여도 하며, 동원도 한다. 즉 다양한 기능이 컴퓨터, 스마트폰 등으로 융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1040 테크놀 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게 된다.

첫째, 이들의 노동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놀이와 노동이 합쳐진 소위 플레이버(plabor. play+labor)이다. 물론 이러한 플레이버의 경향은 탈물질적 사회로 이동하면서도 생기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컴퓨터 안에서 노동과 놀이의 융합 현상이 생겨나면서 젊은이들에게 일반화된 노동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게이머, 웹툰제작자, 파워블로거, '나꼼수' 등이지만 오프라인에서도 '무한도전'과 같은 예능프로, 프로 스포츠 경기, 프로 응원단, 각종 공연 등에서의 노동이 대부분 다 플레이버다. 물론 이런 플레이버가 기업에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조적인 지식노동 및 문화산업 직종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관료적으로 통제 관리를 하면서 커온 회사에 이들 테크놀들이 입사하면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의 재주가 죽어버리는 것도 사실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플레이버이기 때문이다.

둘째, 테크놀들은 소비 역시 재미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笑費'(funsumption)를 한다. 아주 기본적인 기능만을 충족시키는 예전의 단순한 소비보다는 재미와 문화를 결합한 소비를 하고 있다. 예쁜 것, 재미있는 컨텐츠, 나만의 개성을 살리는 소비, 문화적인 상품에 대한 수요 등이 1040 사이에 존재한다. 야구장에서의 응원 문화, 공연장에서의 열기, '나꼼수'과 같은 콘텐츠의 소비 등은 모두 funsumption이다.

셋째, 테크놀의 놀이와 일과 소비의 융합은 정치적 표현과 참여도 문화적으로 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의 촛불문화제, 청춘콘서트, 인증샷 놀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한 풍자, 만화 및 동영상 제작 등 소위 문화적 정치참여의 형태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이러한 정치참여나 정치적 항의를 플레이틱스(playtics. play+politics)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정치참여에는 자연히 냉철한 논리와 함께 가슴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정서적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따라서 이들은 감동과 재미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테크놀들이다. 고리타분한 투쟁적 방식으로 이들을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길들이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겨난다.

테크놀들이 바라는 세상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세상을 원하는 것일까? 이 글의 전편(☞바로가기)에서 필자는 대한민국에 봉건적 신분질서가 재탄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봉건적 신분질서는 창조적이고, 자유롭고, 스펙이 뛰어난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답답한 장벽과도 같은 질서이다.

테크놀들은 단군 이래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민주적이며, 스펙을 쌓는데 투자를 가장 많이 한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이들은 이들의 능력과 자격에 걸 맞는 자기실현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양극화와 신분질서의 공고화, 그리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지켜내는 정부 혹은 국가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참여를 시도하고, 투표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테크놀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신들보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성세대가 자신들을 훈계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꾸짖고, 주요한 자리와 기회를 독차지 하는 것을 보면서 화도 나고, 절망도 하고, 또 꽉 막힌 장벽 앞에서 미래가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은 안철수에게 열광한다. 자신들과 비슷한 스펙과 능력으로 성공한 테크놀이기 때문에 테크놀의 우상이다. 또한 안철수는 이들에게 훈계하고 권위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위계적 질서를 거부하고, 나눔도 실천한다. 기존의 신분질서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테크놀의 문화 속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을 나누고 그들의 불안과 불만에 공감한다. 안철수는 이들의 지도자이기 보다는 영웅인 것이다.

테크놀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부르주아지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창조성과 스킬을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쌓아나가고 펼쳐보기 위해 어느 정도의 복지를 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체제 변혁세력이지 체제 전복세력은 아니다. 봉건적 신분질서에 절망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지만, 새로운 신분질서에 절망하고 있는 한국의 테크놀러주아지는 선거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과연 이러한 테크놀들을 껴안을 수 있는 어젠다와 정치지도자를 가진 제도권 정당은 존재하는가?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거부가 단순히 민주당이나 민노당, 혹은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야권의 개혁도 요구하고 있다. 당장은 한나라당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지는 하지만.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싱크탱크 ‘미래智’ 원장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07104751&Section=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