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정동칼럼) 북한의 새 길, 낡은 길 되지 않으려면 (경향신문 20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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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정동칼럼]북한의 새 길, 낡은 길 되지 않으려면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 발언은 과거의 편견과 관행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즉 외교의 “혁신”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과거의 편견과 관행을 깨는 것을 우리는 혁신이라고 부른다. 서로 따로 존재하던 것을 한군데로 모아 놓은 스마트폰을 혁신이라고 부르고, 상품 제조의 각 공정을 컨베이어벨트의 흐름에 올려놓아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생산방식을 혁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과거의 생각과 관행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김정은 위원장은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동결하고 세계무대로 등장하여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는 점에서 혁신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특히 실무진 간 지루한 사전협상 과정을 건너뛰고 정상이 결단을 통하여 협상을 밀고 가는 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실제 내용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실무협상과 정상회담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을 제외하곤 북한은 딱히 새로운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예전부터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선호해 왔고, 비핵화의 과정을 지금과 같이 단계적, 동시적으로 진행하려 하였다. 북한이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을 선제적으로 폭파하고, 억류 미국인을 송환한 것도 과거의 관행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1994년 영변 원자로 동결이 있었고, 2007년에는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도 있었다. 199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억류 미국인이 송환되었고, 2009년과 2010년에도 클린턴 전 대통령과 카터 전 대통령이 억류 미국인을 데리고 나오는 등 여러 차례 송환이 있었다.


반면 놀랍게도 진정한 대북 외교의 혁신을 보인 것은 북한의 제안을 맞받아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우선 독재국가, 불량국가로 악마화되어 있는 북한과 정상회담을 두 번이나 전격적으로 열었다는 점, 그리고 그중 한 번의 정상회담을 결렬시켰다는 점, 결렬 이후에도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라고 표현하며 다시 정상회담을 이어가려는 점, 한·미 연합군사 훈련을 도발적인 전쟁게임이라고 하면서 중단시킨 점 등은 과거 미국 정부의 생각과 관행에서는 나올 수 없는 파격들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최고도의 압박을 가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완벽에 가까운 대북 제재 전선을 만들어낸 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작업이다. 이러한 파격을 조합해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혁신이 분명하게 보인다. 한쪽에서는 핵개발의 책임을 물어 경제적으로 역대 최강의 압박을 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김 위원장을 역대 최고로 예우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 하여금 실질적 비핵화 말고는 국제사회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제재전선 탈출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미국이 김정은 위원장을 예우하는 한, 핵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을 재개할 명분이 없으며, 북한이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빠른 비핵화를 통해 제재를 빨리 푸는 방법밖에 없다. 이른바 외통수에 걸려버린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혁신적 협상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였고 또 이 구조가 매우 잘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구조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놀랄 만한 인내를 보였다. 이제 이 흐름 속에서 4월11일 우리는 미국과 정상회담을 한다. 이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당연히 북한 비핵화 방안과 북·미 협상의 재개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만약 북·미 협상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 미국에 무리하게 제재전선을 풀라고 설득한다면 정상회담은 무겁게 진행될 것이다. 미국의 혁신적 협상 구조를 깨라는 요구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혁신적인 대안의 발견이다. 그것은 바로 북한이 거절할 수 없는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의 제안을 미국과 함께 만들어 북한에 제시하고, 북한이 최단시간에 비핵화를 이루어 경제제재를 빠르게 완화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이 새로운 길이라는 이름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진정한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한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한·미관계도 어긋나면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