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박철희의 한반도평화워치) 대북 제재 해제는 비핵화 진전 속도에 맞춰야 (중앙일보 2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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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비핵 평화의 길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전면적 완전한 비핵화라는 빅딜(big deal)을 북한에 요구했지만,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완화를 바꾸는 스몰딜(small deal)을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과 부딪치면서 결국 노딜(no deal)로 귀결되었다. 북한은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현실임을 알게 되었고, 미국은 북한이 부분적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노이회담에서 드러난 북·미 간 입장 차이는 표와 같다. 북한의 셈법은 현재 북·미간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영변 핵시설 해체를 중간 종착점으로 삼아 제재 완화를 얻어낸 후, 신뢰 구축 여부에 따라 비핵화를 더 논의한다는 방식이다. 미국은 영변을 중간 기착지로 하지 않고 핵 프로그램 전체를 신고·검증·파기해야 제재를 완화하겠다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 중지와 영변 핵시설 파기를 사실상 핵심적 제재 완화와 교환하려 한 것은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잘못 읽은 것이다. 미국 하원을 민주당이 장악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실질적인 비핵화의 진전을 내놓아야 했다는 점도 북한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반도 비핵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복합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균형이다. 비핵화를 뒤로 미룬 평화는 위장된 평화일 뿐이고, 평화 구축 없는 비핵화도 진전되기 어렵다. 둘째, 국가 안보와 평화의 균형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안보 해체는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안보 강화 일변도는 평화 협력 추구를 어렵게 한다. 셋째, 민족 공조와 국제 공조 간 균형이다. 민족 공조만을 앞세우면 국제 고립을 심화시키고, 국제 공조만 앞세우면 한국의 평화 주도는 사라진다.
 
현재 진행 중인 비핵화와 평화 구축의 프로세스는 목표가 불분명하고, 과정이 불안정하며, 결과가 불확정적이다. 한반도 비핵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한국이 북한에 영변+α를 폐기하도록 설득해 북·미간 입장 차이를 줄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부분적 비핵화를 선행하고 영변 핵시설의 완전한 파기를 중간 종착점으로 삼고자 하는 북한의 로드맵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영변이라는 한정적·부분적 핵물질 생산시설 파괴로는 미국도, 한국 국민도, 국제사회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미 알려진 핵심적 핵물질 생산시설, 기존에 생산된 핵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미사일 시설 등이 비핵화 대상에 총체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북·미 협상을 통한 비핵화의 진전을 도모하려면 한국이 북한에 우선 영변 이외의 핵심적 핵물질 생산 시설들을 신고·검증하는 로드맵과 시간표를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둘째, 핵심적 대북 제재 해제는 포괄적 비핵화의 진전 속도에 맞춰야 한다. 대북 제재는 북한을 협상장에 나서게 하고 비핵화와 관련된 양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북한이 이번에 요구한 5개의 제재 완화는 부분적 해제 요구가 아닌 석탄·석유 교역, 노동력 송출과 관련된 사실상 핵심적인 제재 완화 요구였다. 포괄적 비핵화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북한 요구를 수용했다간 비핵화의 길은 더욱 멀어진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남북 철도 연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협력 사업에 속도를 높이기 위해 미국 및 국제사회를 향해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것은 한·미 갈등과 국제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다.

셋째, 주한 미군은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주한 미군은 한국 안보의 기축이다. 주한 미군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사라져도 북한의 비대칭적 군사 자산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한, 그리고 한국의 자주방위 능력이 한국 안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대북 협상의 대상에 올리거나 약화·포기해서는 안 된다.  
 
북한은 향후 군사적 신뢰 조치의 필요성을 들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할 공산이 크다. 주한 미군의 지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협정보다는 남북·북미 간 적대 관계 청산, 북한에 대한 불가침 약속,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지지를 선언하는 방식으로 평화체제를 짜나가야 한다.
 
넷째, 중국을 다면적으로 설득해 비핵 평화 논의에 동승시켜야 한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고강도 제재의 성패를 손에 쥐고 있으며,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 보장을 유효하게 제공할 수 있는 국가다.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중국은 동북 아시아에서의 유일한 핵 보유국이라는 지위를 잃게 되고, 장기적으로 한국·일본 등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을 잃는다. 북한의 비핵 개방이 이루어지면 중국의 동북 3성이 발전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장이 지속한다면 중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멀어진다. 따라서 북한 비핵화가 실패할 때 중국이 감당해야 할 비용과 평화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제시함으로써 중국을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동승시켜야 한다.
 
다섯째,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사 갈등을 넘어 전략적으로 포용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일본의 역할은 미미해 보이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북·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일본은 북한에 대한 경제 협력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민간 투자를 늘릴 것이다.  
 
반면, 북한의 비핵화에 실패하면 한·미·일 안보 협력은 중차대해진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동적 연대가 확보되고 일본에 산재한 7개 유엔사령부 후방 기지가 제대로 작동될 때만 한반도 안보는 담보된다. 이를 위한 일본 정부의 협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한·일 갈등을 방치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한반도 평화를 지속할 수 있게 하려면 한·일 갈등이 더는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일본을 전략적으로 포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