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오피니언 포럼) 외교 뒤흔드는 4가지 위험한 환상 (문화일보 201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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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

[오피니언] 포럼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인들이 국제 문제를 인식할 때 나타나는 습관병 같은 게 있다. 하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식으로 세상을 보면서 바깥 세계에 대해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빠지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우리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데 있다. 또 하나는, 역사적 사실과 경험적 근거보다는 신념, 이념과 아집으로 정책을 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무장만 강화할 뿐 전략 공백 상태를 방조한다. 다른 하나는, 진영 논리에 빠져들어 상대방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반대 논리를 폄훼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색당파가 그랬듯이 민초는 죽어가는데 정치인과 정부는 체면치레에만 시간을 쓴다. 그런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 환상에 젖어 있는 집단 착오 현상이다. 

지금 한국 외교는 근거 없는 집단 환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첫째, 한·미 동맹은 굳건하므로 미국은 결코 한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지금까진 그랬다. 하지만 미국 우선 논리를 내세우며 상업적 안보관을 앞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한국을 버릴 수도 있다. 북한과의 협상이나 한국과의 방위비 분담 협상 카드에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군 문제를 들이대며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 트럼프 리스크는 생각보다 크다. 

둘째, 북한에 선의를 베풀면 북한도 비핵평화로 화답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하지만 북한은 지난 25년간 국제사회를 수없이 속여 왔다. 지금도 북한은 북한식 비핵화를 말할 뿐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비핵화에 대해 행동으로 답을 내놓은 게 없다. 우리는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비핵 평화를 원한다. 북한이 바라는 평화는, 한·미 동맹을 약화시킨 상태에서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하려는 건 아닌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셋째, 중국과 일본은 서로 철천지원수여서 우리 모르게 뒷거래를 하거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란 환상이다. 양국은 서로 신뢰가 없지만, 미국의 일방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막아내기 위해 손을 잡기 시작했다. 무리한 요구만 거듭하는 한국에 피로감을 느낀 일본은 맘에 들지 않는 중국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동아시아 전문가는, 악의를 가진 능력자 정권인 중국과, 비판만 하는 무능한 정권 한국 중에서 일본은 서슴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한국 기업과 함께 세계를 무대로 제3국에 진출하려던 일본 기업들은 한국을 버리고 서서히 중·일 기업 합작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넷째, 한·일 관계는 나빠져도 손해 볼 게 없다는 환상이다. 적어도 국내정치에서 얻는 정치적 이익이 일본을 비판해서 얻는 손해보다 크다고 치부한다.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이 강한 나라로 다시 일어나 미국·중국·러시아·유럽을 상대로 큰 판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은 여전히 피해자, 약소국으로 생각하고 일본을 흠집 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일본 돈이 일거에 빠져나가고 환란(換亂)을 겪을 때 무고한 국민들이 장롱 속 금반지를 꺼내 들고 나라를 위해 ‘헌납’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후방 지원이 절실한데도 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북 문제만 잘 풀리면 다른 모든 외교는 팽개쳐도 괜찮은 건가? 문제는 미·북 관계도 남북 관계도 우리의 기대대로 풀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무관심·무대책·무책임으로 이어지는 환상 속의 외교는 접어야 할 때다. 대책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해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