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정동칼럼) ‘반지성주의 사회’ 경계해야 (경향신문 20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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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정동칼럼]‘반지성주의 사회’ 경계해야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10년 말에 출판된 김난도 교수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청년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끌어내며 우리 사회에 힐링 열풍을 몰고 왔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고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청년들에게 위로가 필요하고, 불안을 달래는 이야기가 필요했으리라. 그 이후로 힐링과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고, 비슷한 강연이 잇따르고, 이른바 문화계는 힐링의 홍수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러한 힐링이라는 것이 방황하는 젊은 시기 용기를 주고,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객관화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이러한 흐름의 밑바닥에는 찬찬히 문제를 파악·분석하여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보다는 일시적인 감성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면이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힐링 열풍은 곧 많은 지식인, 평론가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청년들도 아프지 않은 청춘이 필요하다며 이 책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부터 힐링 열풍이 문화계에서 급속히 사그라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2010년대의 마지막을 고하는 2019년 현재 과연 힐링 열풍이 사그라졌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갖게 된다. 과연 대한민국이 그때의 힐링 열풍에 대한 반성으로 인하여 더 찬찬히 사유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불행하게도 필자는 대한민국이 오히려 힐링과 공감과 증오와 재미와 편싸움이 아니면 관심을 끌지 못하는 “감성의 나라”가 되고 있다는 증거를 너무나 많이 보게 된다. 물론 그만큼 아직도 청년들과 국민에게 답이 안 보이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회현상이겠지만, 김난도 교수의 책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역시 비판에서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반작용 정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사유와 대안을 모색해야 할 지식인들이 오히려 더 많이 감성적이 되어가고 있다.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고, 요즘 말로 엔터테이닝하지 않으면 독자를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글의 논리나 참신한 생각보다는 글의 아름다움과 재미, 또 나와 같은 편에 있는가가 독자 수를 결정한다. 소위 비판적 지식인들이 만드는 세계이지만 사유와 대안의 세계라기보다는 아직도 힐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감에서 힐링을 하고, 재미에서 힐링을 하고, 같은 편이라고 확인하면서 힐링을 하고, 수려한 문장에서 힐링을 한다. 이러한 힐링의 세계는 방송매체에서 다루는 소위 인문학 강연이나 세상을 바꾼다는 강연 등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새로운 연구 성과와 새로운 통찰을 주로 소개하면서 강연 장르에 새바람을 일으킨 TED라는 미국의 프로그램과 달리 우리의 비슷한 유형의 프로그램은 역시 공감과 재미와 감성, 위로에 치중해 있다. 새로운 연구 성과나 사고의 전환을 접하면서 자극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터넷, SNS 공간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자극적인 내용이나 사진을 통해 조회 수를 올리며 위안을 받고 돈을 버는 공간이 된 지는 이미 오래이고, 토론도 배우고 대안을 찾는 진정한 의미의 논쟁이기보다는 편을 나누어 이겨야 하는, 그래서 승리의 짜릿함으로 위안을 받는 게임이 되고 있다. 증오와 저주의 댓글과 포스팅도 일종의 힐링이다. 대학의 강의도 명강의는 재미있는 강의이고, 내가 생각하기보다는 선생님이 대신 생각해주는 강의이다. 그리고 그다지 힐링에 도움이 되지도 않아서 대학이 공허해진 지도 꽤 되었다. 전문서적이나 잡지는 안 팔리고, 심지어 전문가들끼리도 잘 읽지 않는다. 학회는 사교장이나 여행 프로그램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감성과 힐링과 자극과 공감만이 넘치는 사회를 ‘반지성주의 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반지성주의 사회가 도래한 것은 삶이 빡빡해진 탓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고 또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그다지 사유를 좋아하지 않기에, 자신을 개발하기보다는 남이 대신 해주길 바라고, 더 쉬운 감성의 길을 택한다. 그걸 알고 이런 감성을 더 자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과 장사꾼들이 나오고, 인간을 인공지능의 심부름꾼으로 만들려는 과학자와 사업가가 나온다. 이 추세가 더 깊어지기 전에 지성주의 사회를 만들지 못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성과 인공지능에 휘둘리는 신종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김난도 교수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식이 비즈니스가 된 시대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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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02052015&code=990308#csidxdce5106fdd8b718858538aa99c399f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