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교수](5공 전사 - 깊이 보기)(2)신군부는 정말 몰랐을까 김재규가 총 쏜 이유를 (경향신문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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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5공 전사 - 깊이 보기](2)신군부는 정말 몰랐을까 김재규가 총 쏜 이유를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0·26, 혁명인가 사건인가

<b>김재규, 너무 빨랐던 재판과 처벌</b>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맞은편에 앉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이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의 권력장악과 제5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총성’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는 200여쪽에 걸쳐 ‘10·26’의 전모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군복을 입고 있는 김재규 육군 중장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재규, 너무 빨랐던 재판과 처벌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맞은편에 앉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이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의 권력장악과 제5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총성’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는 200여쪽에 걸쳐 ‘10·26’의 전모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군복을 입고 있는 김재규 육군 중장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산케이 칼럼니스트 시바다 미노루는 ‘한국, 총격과 위기의 55일’이라는 글에서 김재규의 최종진술에 대해 비판하면서 김재규가 주장하는 민주회복혁명의 허구성을 낱낱이 규명했다. … 첫째 김재규가 민주회복혁명을 목적으로 한 혁명가라면 그 혁명은 계획적인 것이어야 한다. … 둘째 만약 김재규가 일찍부터 민주회복혁명을 목표로 했다면 왜 과거 중정부장 재직 시 유신체제의 지주였다고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를 보완하기 위하여 긴급조치 10호를 선포하도록 주장했을까? 셋째로 김재규의 민주회복혁명 이론은 그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반체제 변호인들의 영향이 작용한 이론으로 보여진다.”(791~792쪽)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는 ‘한국: 평온유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재규에게 배후가 있음을 시사하고 박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았으면 부마사태 등의 소요가 확대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783쪽) 

<제5공화국 전사(前史)>(5공 전사)가 전하는 10·26사건 관련 외신보도 동향이다. 10·26이 없었다면 신군부가 들어서지 못했기에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신군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정권의 정당성 시비가 생길 수 있는 사건이기에 신군부는 서둘러 처리했다. 그리고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도록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고, 관련자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김재규는 10·26사태 후 민주회복을 위해 박 대통령을 시해했노라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10·26사건은 그가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면 철저한 2중 성격의 위선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 이런 사람이 민주회복 운운하며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은 전후 논리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에 불과한 것이다.”(597쪽) “김재규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임이 밝혀져 암살의 유형에 새로운 형태를 추가한 셈이다.”(576쪽) 

<5공 전사>는 김재규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을 저질렀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5공 전사> 속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흥미로운 몇 가지 내용들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우선 이 사건이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전문 관료들과 군부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예춘추에는 ‘박 대통령은 왜 시해되었는가?’라는 야마까와 아끼오의 글이 실렸다. 박 대통령의 앞길에는 스스로 대통령에서 물러나거나 혁명에 의해 타도되는 방법밖에 없다는 1973년 미 상원 외교위원회가 발표한 풀브라이트 보고의 결론 부분과 한국의 박 대통령은 향후 8년 임기를 모두 마치기 전에 쿠데타로 쫓겨날 것이라는 1976년 말경 미 CIA 간부 도널드 글랙이 카운터 스파이지에 기고한 글을 인용하면서 박 대통령의 시해를 당연한 결과로 보았다. 그는 대통령 시해의 배경을 테크노크라트들과 혁명주체세력 간의 대립이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확대되었고, 권력 내부에서의 권력투쟁과 측근의 충성심 경쟁이 이런 재앙을 불러왔다고 강조했다.”(784쪽) 

“10·26, 김재규 이중성격이 부른 우발적 단독범행”이라 기술하면서 경제정책 둘러싼 권력 대립·한미관계 회복 목적 거론 

부마항쟁 소요 막기 위한 ‘거사’ 해석도…실종 상태 김형욱을 ‘비명횡사’라 적은 집필진, 어찌 알았을까

1978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오일쇼크와 함께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한국 경제가 또 한번 위기에 부딪힌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의욕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가 중복투자와 과잉투자로 그 부담이 커졌고, 1970년대 말 중동으로부터 들어온 달러를 이용한 재벌의 부동산 투자는 또 다른 위기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더해 미국이 한국의 보호무역 철폐를 주장하면서 한국 정부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청와대는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대통령 직속 경제과학심의위원회에 경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지시했다. 1979년 초부터 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는 전면 시장개방이 필요하며, 더 이상 재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계속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점진적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모델의 전면적 청산이냐 아니면 점진적 변화냐의 갈림길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일본인 기자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도 의문이지만, 이러한 갈등이 유신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매우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안정화 계획으로 알려진 정책 전환은 10·26까지 실행되지 않았고,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김재익 경제수석에 의해 실행됐다. 

김재규와 관련자들 대부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에 전말을 밝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근에는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근거로 10·26사건은 하나의 민주화 혁명이었다는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유신체제 반대투쟁의 선봉에 섰던 장준하가 생전에 김재규와 함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었다는 주장이다. 김재규는 법원에서의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 정권에 의한 국민의 희생 방지를 박정희에게 총을 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조사 과정에서 그가 “중정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군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녹지사업이란 명목으로 기금을 뿌려왔었다”는 사실과 박정희를 제거하는 계획을 1979년 6월부터 은밀하게 구상했다는 <5공 전사>의 내용은 김재규가 무언가의 목적을 갖고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거사계획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방대한 조직세력보다는 단독범행이 성사의 첩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703~704쪽). 

‘10·26’을 보도한 1979년 11월5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 표지(왼쪽 사진). <5공 전사>는 실종과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혹을 낳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미 ‘비명횡사’했다고 적었다(오른쪽).

‘10·26’을 보도한 1979년 11월5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 표지(왼쪽 사진). <5공 전사>는 실종과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혹을 낳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미 ‘비명횡사’했다고 적었다(오른쪽).

<5공 전사>는 김재규의 행동에 ‘거사’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10·26이 민주화를 위한 거사였음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적화 방지’와 ‘독재로 인해 안 좋아진 한·미관계의 회복’을 중요한 이유로 밝히고 있는데, <5공 전사>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기 직전 김재규는 그를 말리는 부하 직원에게 “오늘 하지 않으면 안보누수 때문에 안돼”라고 말했다(614쪽).

우선 ‘안보누수’는 무엇을 말하는가? <5공 전사>가 주목한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부산, 마산의 소요사태가 현지의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어 평온을 회복할 즈음 서울을 위시한 전국 각지의 대학가에서는 산발적인 학내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 그러나 시민들이 가세하지는 않았다.”(565쪽) 중앙정보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자료에 근거해 서술된 <5공 전사>는 부마항쟁이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전개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부마사태는 지금까지 있었던 학생시위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소요사태였다. 부마사태는 교련, 한일회담 등 종래의 정부 시책을 반대하고 나선 학생데모와는 달리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초동단계부터 정권타도와 민주회복을 표방하고 있었다. 또 학생시위를 방관하던 시민들이 이에 가세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특히 부산 일원에서의 데모 양상은 계엄군에 의해 일단 해산된 후 시내 타 지역으로 이동해 또 다른 소요를 일으키는 등 독특한 시위 방법이었다. 야간에는 불량배들까지 가세해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방화하는 등 도시 게릴라식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469~570쪽) 

부마항쟁을 조사하면서 일부 신민당과 통일당 등 야당 당원들이 시위에 가담했다는 정보는 있었지만, “수사 결과 불순배후조직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국민 저변에 팽배해 있던 대정부 및 정치 경제적 불만을 학생데모가 폭발하도록 점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군중심리가 크게 작용하여 사태가 확대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점도 주목된다(572~573쪽). 그렇다면 김재규의 거사는 ‘반(反)혁명 전략’이었던 것인가? 부마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경우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고, 1978년 이란과 1979년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반미혁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독재자를 제거해 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인가? 이는 <5공 전사>에 실려 있는 10·26사건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 관련,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김재규가 최후진술에서 밝힌 ‘한·미관계의 회복’ 문제다.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김재규나 한국의 다른 인사에게 박 정권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든지 또는 우리가 박 대통령 제거를 용인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월28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를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여러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김재규는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을 막고 한·미관계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나? 

<5공 전사>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정치공작에 적극 나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거사’를 민주화혁명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공 전사>에는 유정회 출신의 국회의장 선출 과정, 야당의 전당대회와 김영삼 총재의 제명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이 중앙정보부 요원뿐 아니라 박 대통령까지도 만나 신민당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하고 토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본연의 임무”는 “국내 정치 문제”이며,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 영역을 침범하자 결국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5공 전사>는 결국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 스스로가 비극을 자초했다는 것으로 10·26사건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박 대통령 자신이 ‘인간인 이상 나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고 77년 봄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집권 말기에 그가 범한 우는 유신체제를 구축하여 정치부재, 행정력 지상의 현상을 초래하게 한 데 덧붙여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의 인선에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582~583쪽)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었지만, 권력의 핵심기관으로서 이런 악습의 온상은 주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그리고 중앙정보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이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과 권력의 핵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사리사욕이었다.”(585쪽) 

박정희가 선택한 측근들의 사리사욕으로 유신체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5공 전사>는 실종된 김형욱이 죽었다는 사실도 적고 있다. “결국 만리타국에서 비명횡사로 최후를 맞았”다고(589쪽). 그의 실종은 알려져 있지만 죽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5공 전사>를 쓴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210600055&code=940100&s_code=as211#csidx26042cf4f554b4ea63f322b89806a4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