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교수](5공 전사 - 깊이 보기)(1)신군부의 박정희 시대 비판은 ‘내로남불’ 딱 그 수준 (경향신문 20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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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5공 전사 - 깊이 보기](1)신군부의 박정희 시대 비판은 ‘내로남불’ 딱 그 수준

박태균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계엄군이 군통수권자인 독재자를 옹호하지 않고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견지했다는 점이다. 당시 군의 중립성 견지는 빛나는 기록을 남겨 놓았으며 정도를 택한 군의 태도는 높이 평가되었다.”(43쪽)

마치 객관적인 역사학자가 쓴 글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이 글은 4·19혁명 당시 군의 입장에 대해 서술한 <제5공화국 전사(前史)>(5공 전사)의 한 부분이다. 12·12쿠데타로 하극상을 일으키고, 5·17쿠데타로 광주의 많은 시민을 학살한 후 새로운 독재정권을 수립한 신군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5공 전사>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는 점은 상상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정당정치 기능 마비” “계층 분화·정치 불신 야기” “기업에 특혜 부여, 저소득층 희생 강요”
신군부, ‘5공 전사 1권’서 유신체제 조목조목 비판

5·16쿠데타 세력들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5·16 혁명사>를 썼듯이 5공 신군부는 <5공 전사>를 집필했다. 전 9권(본문 6권·부록 3권)으로 구성된 <5공 전사>의 본문 제1권은 한국 현대사를 분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왜 집권해야 했는지, 그 필연성을 합리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것은 자신들을 키워준 ‘형님’, 즉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다. 조선시대를 개창한 세력들이 고려시대를 비판한 것,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가 고종실록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을 싸잡아 비판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를 합리화하려면 나의 전사(前史)를 비틀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집권을 정당화할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신군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 서술 속에서 신군부 집권기에 왜 그런 정책들이 나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비틀기이다.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유신체제를 만든 ‘형님’들의 지혜로부터 그 명분을 찾았다.

“민주주의의 겉치레가 잠깐 중지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틀이 쪼개져 나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 군사혁명은 결코 민주주의의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의 구명작업이요, 병든 민주주의에 대한 임상수술이다. … 인술의 마음씨로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이다.”(49쪽)

민주주의를 열망한 ‘서울의 봄’과 광주를 짓밟고 유신체제의 아류를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했다. 

전두환은 왜 갑자기 198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내놓았을까? “7·4 성명과 남북대화의 개시가 국민총화와 정권기반 강화에 기여한 효과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60쪽) 북한에 대한 수해물자 지원, 1985년 남북 적십자사를 통한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이 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북관계를 정권 강화에 적극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다.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신문사 제호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신문사 제호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 정부는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여 그해부터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있던 신문사와 정기간행물을 자체 정리토록 하였다. 예를 들어 1972년에 대구일보, 대구경제일보, 창조지 등이 자진 폐간했고, 1973년에는 8개의 일간신문사가 3개로 통합되었으며, 또한 문제가 많았던 동화통신, 대한일보, 호남일보 등이 자진 폐간했다.”(72쪽) “상업방송국을 두 개씩이나 허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업 TV 방송의 역기능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밖에 생각이 안되며….”(234쪽)

정작 5공화국도 ‘시녀 정당’ 민정당 창당하고 재벌에 막대한 혜택
언론통폐합·국풍81 등 문화행사로 여론 왜곡 ‘박정희 정권의 복사판’

1980년대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이루어진 언론통폐합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잘나가던 언론사들이 없어지거나 강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언론 기자들이 해고되어 거리에 내앉게 되었다. 신군부, 그들은 유신체제로부터 언론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매일 9시뉴스의 시작과 함께 전두환이 등장하는 ‘땡전뉴스’가 시작되었다.

‘국풍 81’ 당시 탈춤 공연.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풍 81’ 당시 탈춤 공연.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국민들의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문화적 장치가 필요했다. 1981년 5월 말에 있었던 국풍 81을 기억하는가?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우리 국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한 문화축제’라는 명분하에 전국 194개 대학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동원되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 측 통산 1000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 5공전사 1권 233쪽 >

< 5공전사 1권 233쪽 >

“60~70년대 한국 정부의 대책 수립자들은 참다운 문화에 대한 비전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고급문화 형성에 우선하느냐 아니면 대중의 문화 확산에 우선하느냐의 이른바 정책적 우선순위도 결정하지 못했으며….”(234~235쪽) “한국의 교육내용은 일본의 영향과 미국 문화의 무비판적 도입으로 문화적 식민주의 모형을 크게 탈피하지 못했으며….”(225쪽) “문화적 아노미 현상은 1차적으로 5·16 이후의 정부 문화정책의 실패로 귀착되어진다.”(233쪽) 뜻은 담대했건만, 국풍 81은 아무런 사회적 효과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유신체제가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5공 전사>의 지적은 수준이 매우 높다. 유신체제의 성과를 경제성장과 국가의 총력안보태세 신장, 농촌 근대화의 성과, 국가건설 등 4가지로 요약하면서도, 유신체제가 갖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소득분배의 왜곡, 시장경제의 왜곡, 물가고와 경쟁력 기반의 약화가 중요한 문제였으며, 사회적 불균등과 계층적 분화의 문제도 지적했다. 안보적 측면에서의 성장이 돋보이지만, 미군 없이는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에 주목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곡의 자급이나 농업생산의 채산성 미달, 농민의 낮은 평균소득 등은 유신체제가 배태한 심각한 문제였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 정치인과 정치권력의 국민에 대한 정치적 대응성 위축, 윤리의 부재와 과정적 정의이념의 경시풍조’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얻고자 하는 사회풍조는 유신체제가 낳은 정치적 부작용이었다. 

< 5공전사 1권 60쪽 >

< 5공전사 1권 60쪽 >

< 5공전사 1권 61쪽 >

< 5공전사 1권 61쪽 >

“요컨대 통치는 있었으나 그것은 결코 국민 여망에 부응한 것이었다고 볼 수 없으며, 정당과 의회는 있었으나 대화와 협상을 본질로 한 정당정치나 의회정치는 불모상태였다.” “유신시대를 공화당 시대와 구분하는 이유는 유신체제하에서 정당정치란 그 형태만 존재할 뿐 사실상 그 기능이 마비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 공화당은 집권당이라기보다는 행정부와 그 수반의 휘하에서 기능하는 일종의 시녀정당에 불과했으며….”(61쪽) 결국 그 해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선출함으로써 입법권까지도 장악하는 유신정우회의 해체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녀정당인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었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유사 야당이 나타났다. 유신체제 비판과 민주화에 적극 참여한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신군부에 의해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이라는 관제 야당이 출범한 것이다. 어쩌면 유신정우회를 통한 입법부의 장악이 국민에게 더 솔직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신군부 등장 이전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전체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은 경제분야였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가? “적극적인 외자도입은 우리 경제의 시설능력을 확대시켜 고도성장을 실현케 하는 밑거름이 되어 왔다.”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19세 이하 월드컵(코카콜라컵)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멕시코의 고지대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한국의 청소년 대표팀이 4강에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외신들이 이 월드컵을 ‘외채 월드컵’이라고 부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4강에 올라갔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한국은 외채가 많은 세계 4대 채무국에 속해 있었다. 외채로 인해 한국 경제가 붕괴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던 것이 당시의 경제상황이었다. 경제성장 시대로부터 배운 교훈을 그대로 실행한 신군부의 시대는 3저 호황(유가, 환율, 국제금리 하락)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뻔했던 위급한 상황을 경험했다.

< 5공전사 1권 174쪽 >

< 5공전사 1권 174쪽 >

“높은 인플레는 자본주의의 병폐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시키게 된다.” “기업에 특혜를 부여하는 경제운영방식을 실시함으로써 저소득층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소득분배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지 못했다.”(174~175쪽) 그렇다면 그 해법은 무엇인가? ‘그래도 전두환 시대 때에 경제는 좋았어’라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물가안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군부는 소득불균형이나 기업에 대한 특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1980년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벌은 더 큰 규모로 성장했고,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들이 한계로 지적한 “1970년대 우리 경제의 운용은 대기업 부호 위주의 배급경제 내지 관급경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1980년대를 통해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5공 전사>의 경제분석은 실제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지만, 지금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대목이 적지 않다. ‘투자순위의 우선순위가 지나치게 편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화학의 생산액이 급속히 증가하지 못했던 점, 중복투자로 인해 국민경제에 주는 부담이 막대했던 점, 중장비와 발전설비를 동시에 추진하려는 과욕에 대한 비판, 중화학 제품 수요를 전적으로 수출에 겨냥했던 점, 기업에 대한 지나친 보조금으로 경쟁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던 점 등은 유신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이자, 재벌 중심의 경제를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5공 전사>에서도 언급되어 있건만, 지금도 1970년대 경제성장을 찬양하는 이들의 목소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중한 분석이다. 신군부도 이 부분을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5공 전사>의 한국 현대사 분석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분석적이며, 심지어 객관적인 내용까지도 포함한 수준 높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분석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교훈을 어떻게 이용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좋은 교훈을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교훈을 좋은 정책을 만드는 데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 교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써 놓고도 신군부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았다. 교훈을 나쁘게 이용한다면, 차라리 역사 공부를 하지 않는 게 낫다. <5공 전사>를 통해 신군부가 배운 역사는 단지 그들의 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이용되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140600005&code=940100&s_code=as211#csidx5f3c0c5a562ee2a8939e5e74cb84b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