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교수](기고)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진퇴양난 韓외교 (매일경제 20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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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기고]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진퇴양난 韓외교

미국에서 한국 불신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남북관계 호전은 좋지만 비핵화 추진에 앞서 제재 완화를 외치는 모습에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미·중 무역분쟁이 한창인 즈음에, 중국과 일본은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과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쐐기를 박듯 관계 개선에 불을 지폈다. 일본에 과거사 문제로 트집만 잡는 한국은 전략적으로 방치하면서 지역의 경쟁국인 중국과는 은근히 손을 잡는 양상이다.북한도 한국에는 경제지원만 바랄 뿐 비핵화는 미국하고만 얘기하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결국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북한 등 주변국에서 냉소적인 반응에 직면해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판결은 그런 와중에 나왔다. 어찌 보면 재판거래 의혹과 사법농단을 내세우면서 강제징용 판결을 늦춘 것을 공론화하는 순간부터 재판의 결론은 이미 유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반기 들어 위안부와 관련해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 통보, 국제관함식에 욱일기 게양 자숙 문제로 일본 해상자위대 불참 등 일본에 대한 강경 자세가 이어진 뒤에 나온 결정이라, 단타가 아닌 연타 보디블로 게임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다. 남·북·미 전선에 노란불이 들어오자 반일 전선에 파란불이 켜진 건 아닌가 싶다.

문제는 대법원 판결이 한일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판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이 행한 행위가 불법이라는 전제 위에 내려진 판결이라면,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행한 모든 행위에 이런 멍에를 지울 수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고, 강화조약의 후속조치로서 청구권 조약을 통해 민간 부문의 미결 과제인 임금, 보험, 저축, 연금 등 청구권에 대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했다. 좋건 싫건 국가행위였다.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은 정치지도자의 포켓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 조성에 쓰였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2005년 한일기본조약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정부는 민관 합동위원회를 통해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이주민 문제 등 세 가지 현안을 제외하고는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문제가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사법부의 판단은 이러한 행정부 판단과 어긋나는 결정이어서 신중한 정책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전반적으로 실험대에 올려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외교는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라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일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껄끄러운 상대다. 우리 맘속에 있는 일본은 나쁜 나라니까 샌드백처럼 쳐도 괜찮다는 무의식이 작용한다. 사과가 불충분하고 책임을 피해가는 일본이 진정성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에는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의 과거사 요구에 지쳐 있다. 한국이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 요구를 거듭할 것인지 알 수 있어야 친구로 남을 수 있다. 불법행위에 대한 보상 결정은 연장전 돌입 신호탄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는 않을 거라는 안이한 인식은 국제정치에서 통하지 않는다. 국가 간 관계는 이익의 교환 위에 성립한다.

북한에 올인하고 있는 현 정부의 눈으로 보면 일본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비핵화에 도움을 주기보다 납치 문제에만 신경 쓰는 속 좁은 나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한반도 비핵화가 진행되어 북한을 정상국가화할 경우 가장 많은 자금을 공여할 수 있는 파트너다. 만약 북한이 핵무장을 계속한다면 미국과 더불어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함께 책임질 국가도 일본이다. 그런 일본에 삿대질만 해서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정의도 살려야 하지만 실리도 챙겨야 하는 게 국가관계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