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근 교수](시론) 미국의 트럼프와 WTO의 위기 (중앙일보 2017.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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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한·미FTA 재협상보다 심각한 트럼프 통상정책의 그늘은
WTO체제 안정성의 훼손 시도 대비 위한 통상체제 보강해야

안덕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안덕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지난 3월 1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2017년도 통상정책의제보고서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화된 미국 행정부의 통상정책이 제시된 점에서 주목할 문서다. 정책의 구체성은 결여되었지만 그간 대선 과정에서의 엄포로만 비친 공약이 정책 청사진으로 명문화되었 다.
 
총 300쪽이 넘는 보고서 중 7쪽 분량을 할애한 2017년 통상정책 의제를 통해 USTR은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국가주권을 통상정책보다 우위에 두고 이를 “공격적”으로 지켜나가겠다고 거듭 천명했다. 특히 세계무역법원 역할을 하며 세계통상 체제를 규율해 온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제도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미국 국내 통상법의 시행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향후 미국의 통상 문제에 대해선 1995년 출범한 WTO 체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일방주의적인 해결책을 고수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국내 언론이 주목하는 한·미 FTA 재협상 여부보다 실제로 트럼프 통상정책이 우리의 통상환경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부분은 바로 WTO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하는 점이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장 개방 기능이 이전된 이후에도 WTO를 세계무역 체제의 중심에 자리매김케 한 핵심은 분쟁해결 기능이다. 95년부터 현재까지 522건의 국제 통상소송이 접수된 WTO 분쟁해결제도는 국제 사법절차로서는 유례없이 효과적으로 활용돼 왔다.
 
지금까지 이 제도를 가장 많이 사용한 미국은 114건의 제소를 한 반면 129건의 피소를 당했다. WTO 소송에서 노하우가 가장 앞선 미국도 소송을 당한 경우가 소송을 건 분쟁보다 많고 대부분의 피소 건에서 패소한 점은 WTO 분쟁해결제도의 객관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우리 정부도 최근 일본에 소송당한 2건을 포함해 총 16건에서 피소되고 17건을 제소했는데, 제소 건 중 11건이 미국을 대상으로 제기한 분쟁이다. 2001년 12월 WTO에 가입한 중국도 2004년 3월 미국에 의해 최초로 소송을 당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39건의 피소를 당했고, 2002년 3월 제소를 시작한 이래 총 15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에는 WTO 분쟁해결제도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부 분쟁에서 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판결은 WTO 회원국들이 최선을 다해 수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예전 식민지 국가들과 유지해 오던 바나나 수입 관련 특혜조치, 미국의 해외영업 기업에 대한 법인세 혜택, 중국 신용카드 시장에서의 유니언페이 카드 독점체제 등 막대한 경제적 영향과 정치적 비용이 초래되는 조치들이 WTO 판결로 철폐되었다. 국내에서도 수입 위스키와 소주 간의 주세 차별, 캐나다 소고기 수입규제 등이 WTO 소송에 의해 개선되었다.
 
그러나 반덤핑 관세를 증폭시키는 계산 방식에 대해 패소한 후 이행 문제로 곤욕을 치른 미국은 2016년 거의 모든 WTO 회원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단적으로 한국 출신 재판관의 연임을 막아 제도의 공정성과 독립성에 심각한 우려를 초래했다. 당시 모든 전임 및 현임 재판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미국의 입장을 바꿀 수 없었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아예 WTO 분쟁해결제도 자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 WTO 체제의 근간을 위기로 몰고 있다. 더욱이 통상정책의제보고서는 WTO 체제 출범 이후 한 차례도 무역보복조치 시행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던 소위 ‘301조 절차’까지 부각했다. 미국 의회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 의원들까지 트럼프 통상정책 의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나서는 이유다.


WTO 체제에서 출범한 도하라운드협상은 2015년 12월 나이로비 각료회의 직전에 당시 프로먼 미국 무역대표가 타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협상을 포기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졌다. WTO 협상을 내던진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대안이 일본을 포함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유럽연합과의 범대서양무역및투자동반자협정(TTIP),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서비스무역협상(TISA)이었다. 새 정부 출범 직후 11개 TPP 회원국과의 합의를 무산시킨 트럼프 행정부의 USTR이 세계통상 체제에 던지는 과제는 그간 미국의 과거 정부들이 많은 비용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키고 발전시켜 온 분쟁해결제도, 나아가 WTO 체제의 존속과 유지 문제다.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환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164개 WTO 회원국의 신뢰를 기반으로 구축된 WTO 체제의 운명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WTO 체제의 위기는 곧 우리 통상 체제의 위기다. 북핵 위기 때마다 국방안보 공조 차원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도 미국 시장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통상 권익은 WTO 소송으로 지켜왔다. 앞으로 우려되는 무역구제 조치의 남발과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에 대한 굳건한 방파제로 믿었던 WTO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우리 통상 체제의 보강이 시급한 과제다.

[출처: 중앙일보] [시론] 미국의 트럼프와 WTO의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