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정동칼럼) 신뢰프로세스의 딜레마 (경향신문 201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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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정동칼럼]    입력 : 2013-03-21 21:26:01

신뢰프로세스의 딜레마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 의회가 2013년 3월1일까지 연방재정적자 감축안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정부의 예산지출이 자동적으로 삭감되는 이른바 ‘시퀘스터’(sequestration)가 발동되었다. 따라서 미국 연방정부는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지 않는 한 향후 10년간 1조2000억달러의 정부지출을 자동 삭감해야 하는데 당장 금년부터 850억달러의 정부지출이 삭감될 예정이다. 금년 삭감분의 약 절반이 국방비 삭감이기 때문에 미국 국방부는 물론이고 한국도 한·미동맹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면서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데 국방부 이외에도 이 자동예산삭감의 뜻하지 않은 봉변을 뒤집어쓸 그룹과 대상이 생겨났다. 국가가 지원하는 과학 연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다 자연과학보다는 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나 많은 정치인들이 자동예산삭감의 우선순위를 논의하면서 이들 눈에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회과학연구에 대한 정부지원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사회과학 및 정책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꽤 있다. 일례로 미국의 국립과학재단에서 약 75만달러를 지원한 ‘문화적 갈등에 있어서 신성가치(sacred value)에 관한 연구’는 차라리 그 돈을 암 연구에 지원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언론의 비난을 받은 연구 프로젝트인데, 이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이 반론에 나섰다.

‘신성가치’에 관한 연구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가에 대한 연구이며, 이러한 연구는 종교적 신념이 되어가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 추진, 그리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동의 테러집단에 대한 연구 및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연구가 없으면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잘못된 해결책으로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하게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아마 한국에서도 사회과학 연구나 인문학적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를 쏟아붓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적 시선은 사실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필자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따가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의 미국 연구자들의 논리와 같이 필자도 사회과학 연구 등이 이른바 연구를 위한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 나온 수많은 이론적 연구는 현실 문제를 이해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짚어내고, 또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국제정치학의 분석틀로 남북한 신뢰프로세스를 들여다보면 하나의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남북한 간에 신뢰가 있다는 말은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서로 합의한 것에 대해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북한의 약속이라는 것은 국가지도자가 둘이 만나서 합의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지도자가 각기 자국의 국내로 돌아와서 국내정치적 반대를 이겨내고 합의된 약속을 실행할 수 있어야 지켜지는 것이다.

이렇게 국제적 차원과 국내적 차원의 약속 이행을 동시에 보는 것을 국제정치학에서는 양면게임(two-level game) 분석이라고 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신뢰는 국내에서 약속을 관철해낼 수 있는 지지도가 높은 지도자, 혹은 역설적으로 지도자가 자기 마음대로 정책집행을 할 수 있는 권위주의 독재국가에서 오히려 이행이 용이하다.

그렇다면 남북한 관계 개선을 원하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원하는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약속이행을 상대적으로 잘할 수 있도록 김정은이 북한의 독재체제에서 정치기반을 잡아나가는 것을 지지할 용의가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출범부터 삐걱거리고 있는데 남북한 신뢰프로세스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야당은 박근혜 정부를 통 크게 도와줄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것은 현실을 매우 단순화해서 보는 분석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적, 인문학적으로 사고하게 되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