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교수]한나라당 '드림콘서트', 액정사회 본질 모르는 '헛발질'(프레시안 20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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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한나라당 '드림콘서트', 액정사회 본질 모르는 '헛발질'
[이근 칼럼] 2040 세대와 테크놀러주아지 <下>
기사입력 2011-11-09 오전 8:17:40
         

'액정사회'의 도래

21세기 대한민국,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일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매우 특이한 현상을 하나 목격하게 된다. 다름 아닌 소위 액정사회의 탄생이다. 모니터사회(monitor society) 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액정사회 혹은 모니터사회는 우리의 일상을 액정화면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물론 모든 모니터가 액정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스마트폰의 알람으로 눈을 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뉴스를 검색하고, 이메일과 문자를 체크한다. 예전에는 화장실에 신문을 가지고 가겠지만 이제는 액정화면 속에서 뉴스를 검색한다. 조용한 것이 싫은 경우에는 텔레비전을 켜고 아침식사를 하고, 자동차나 전철을 타고 출근한다. 자동차에는 내비게이션 액정이 있고, 전철에는 광고용 액정화면이 있다. 하지만 개개인은 대부분 손 안에 액정화면을 들고 있다. 이미 스마트폰 가입자가 2000만을 넘은 상황이다. 지하철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니터로 알 수 있으며, 버스 노선과 시간도 스마트폰으로 알 수 있다. 내비게이션은 단순히 길만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엔터테인먼트가 같이 들어 있다.

회사나 학교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컴퓨터가 기다리고 있다. 요즘에는 책도 액정 속으로 들어가는 추세다. 채팅과 이메일을 하고, 컴퓨터로 일하고 공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만 역시 동일하게 액정의 세계 속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어두워지면 고층 건물의 옥상에 걸려 있는 대형 광고 스크린이 보인다. 집에서는 다시 컴퓨터나 다른 종류의 액정 속에서 문화 활동, 친구와의 대화, 일, 숙제, 놀이를 하다가 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두고 다시 잠에 든다.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액정화면보다 더 가깝고 자주 만나는 친구나 애인, 부부, 직장동료는 없다. 이러한 액정사회의 도래는 역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의 넓이와 깊이는 앞의 글(☞바로가기)에서도 언급한 세대 간의 차이로 나타난다. 액정화면의 영향은 테크놀(러주아지)들에게 있어서는 상호적인 영향, 즉 쌍방향의 영향이지만, 윗세대 혹은 비(非)테크놀들에게는 일방적인 영향에 가깝다. 비테크놀이 할 수 있는 액정사회에의 영향은 액정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테크놀들은 액정 속으로 들어가는 콘텐츠를 통제하고 창조하고, 유통시키며, 통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고 통제의 정도가 지나치면 선거혁명을 통해 정치적인 힘을 행사한다.

봉건적 신분질서 네트워크 VS 테크놀러주아지 네트워크

대한민국에 봉건적 신분질서가 생겨나고 있다고 했는데, 봉건적 신분질서나 새로운 테크놀의 세계나 기본적으로는 그 구성원을 이어 주는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봉건적 신분질서의 전형적인 네트워크는 인맥이다. 결혼을 통한 인맥이 가장 대표적이고 끈끈한 인맥이 된다. 피가 섞이는 친척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트 학교의 학맥, 소수 상류층의 클럽, 사교관계 등이 그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들은 서로의 인맥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상류층을 신분사회화 하고, 공통의 이익을 지켜낸다.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여기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극소수의 재벌과 그를 도와주는 정치인, 엘리트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한편 이들 네트워크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혹은 정보의 면에서 정당화하고 보호해 주는 보조적 네트워크가 언론이다. 한국에서는 소위 보수언론이라고 칭하는 언론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언론이 신분질서의 보조적 네트워크가 된 이유는 이들 언론사의 사주가 신분질서의 네트워크에 이미 속해 있기 때문이다. 보수언론들은 신분질서에 필요한 뉴스를 선별하고, 가공하고, 이에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격살인을 할 때도 있다. 또한 신분질서의 유지 강화를 위한 어젠다를 발굴해 협력적 지식인과 함께 유포한다.

이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일방적으로 정보를 유포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쌍방향의 정보교환과 정보창조가 가능하지 않은 비테크놀, 특히 윗세대가 주요 타깃이다. 신문이나 일반 텔레비전은 그들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시간대와 장소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속성과 다양성에서 새로운 매체에 뒤진다. 만일 국가기구 역시 이들 상위신분 계급에 의해 장악되었을 경우 국가와 여당, 그리고 언론은 협력하여 일방적인 정보를 전달하면서 신분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한다.

반면 테크놀들은 기존의 네트워크와는 전혀 다른 사이버 공간의 네트워크, 정보통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는 특수한 신분과 이익을 보호·확장하기 위한 네트워크라기보다는 매우 평등하고 수평적이고 개방된 쌍방향의 정보 네트워크이다. 반드시 평소의 친분관계나 학연, 지연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공통의 관심과 기호와 재미, 그리고 친구의 친구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특별한 정치적·경제적 목적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유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네트워크라기보다는 평소에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가 그것이다.

테크놀들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접근해 획득할 수 있고, 또 자신들이 만든 콘텐츠를 쌍방향으로 유포할 수 있으며, 플레이버(plabor. play+labor)나 笑費(funsumption), 플레이틱스(playtics. play+politics)를 위해(이 용어는 앞의 글 참조) 재미있고 감동적인 컨텐츠를 만들어 이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있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이들을 오프라인으로 불러낼 수 있는 힘도 있다. 정보의 경우에도 네트워크에서 형성되는 '집단지(智)'를 통해 검증과 검증을 거쳐 진실에 도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액정사회와 네트워크 전쟁

테크놀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활용하는 부르주아지이다. 따라서 앙시엥 레짐과 같은 귀족 신분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유와 다양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창조적인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신분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이러한 신분질서를 보호·유지하고자 할 때, 그리고 그 보호 장치가 인맥과 보수신문과 일반 텔레비전과 같은 기존의 네트워크일 때 테크놀들은 새로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기존의 네트워크를 침식하고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액정사회의 도래는 테크놀들의 네트워크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게 되어 있다. 테크놀들이 바로 액정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고립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액정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50대 이상의 윗세대는 수많은 액정의 내부에서 감동과 재미의 콘텐츠를 만들고 유포하지 못한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일부 액정에만 친숙하다. 그들은 액정에 대한 접근을 통제할 뿐이다. 그런데 특정 액정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면 테크놀들은 다른 액정을 찾아내 연결하고 콘텐츠를 유포할 수 있다. 또한 액정에 대한 접근의 통제가 구식 네트워크로의 접근을 늘리지도 못한다. 오히려 통제에 대한 저항세력의 결집력을 늘려줄 뿐이다.

결국 '청춘 콘서트'와 '나꼼수' 같은 수많은 콘텐츠가 액정사회의 액정 속으로 파고 들어가 앞으로 이변이 없는 한 계속 1040세대를 연결하고 결집시킬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1040세대의 특징과 그들을 끌어들일 콘텐츠가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그들과의 소통만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욱 외면받게 될 것이다. 봉건적 신분질서을 옹호하는 한나라당이 시도하는 '드림 콘서트'가 잘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액정사회에서 이미 네트워크 전쟁은 1040 세대가 이기고 있다. 그리고 인구학적으로·정치적으로 중요한 스윙을 하던 386 세대가 액정으로 완전히 돌아오면 세상이 변화할 것이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싱크탱크 ‘미래智’ 원장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107105846&Section=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