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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 교수](정동칼럼) 한국의 창조성 장벽 (경향신문 2013.11.1)

GSISlNovember 1, 2013l Hit 4149


[정동칼럼] 한국의 창조성 장벽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싱크탱크 미래지 원장
 
국제정치와 관련해 한국의 주요 학술지에 실린 지난 10년간 논문들의 유형과 경향을 조사한 적이 있다. 어떤 주제의 글이, 어떠한 이론적 경향을 반영하여 얼마나 많이 유명 학술지에 실렸는가를 조사해본 것인데, 그 결과 매우 실망스러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독창적인 학문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비슷한 주제에 관하여 비슷한 주장을 하는 논문들이 반복적으로 대량생산되기만 할 뿐, 기존 연구를 정교하게 비판하면서 그 연구와 차별화되는 독창적 연구가 나오고, 이를 계기로 학계에서 활발한 학문적 토론이 이루어지거나 새로운 연구경향이 발전하는 경우를 지난 10년간 단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독창적 논문이 있어도 예외 없이 단발성에 그친다. 불행하게도 독창적 연구와 토론에 기초한 학문적 축적은 대부분 우리 학문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문적 독창성의 미국 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경험과 조사가 정치학계에 머물러 있어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의 실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식생태계라는 것이 그리 과도하게 불균형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짐작하에 다른 분야도 한국사나 국문학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조성의 세계 분업구조에서 한국이 아직도 의존적 발전의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적 인재는 다양한 교육현장에서 길러진다. 한국은 인재 양성과 관련하여 지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학교가 담당하고 있고 가장 창조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곳은 대학과 대학원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암기와 시험 요령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상당 수준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즉 규격화되어 있는 지식을 잘 숙지하고 정리해 내는 능력을 넘어서서 나만의 해석과 주장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을 접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학계에서는 독창적 학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나만의 독창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업을 대학에서 발견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미국이나 해외의 학문과 연구동향을 소개하거나 책이나 인터넷에 다 나와 있는 사실들을 친절하게 정리해 주는 수업이 많다. 물론 이러한 수업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의 고학년과 대학원으로 올라가면서 독창적 사고를 중시하는 수업의 비율이 늘어야 한다. 일방적 강의 위주의 수업방식도 창의적 사고를 죽이게 되며 용감하게 질문하는 학생을 찾기도 쉽지 않다. 대학원에서 세미나를 진행해 보아도 정교한 논리를 가지고 기존 논리를 비판하고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는 학생은 가물에 콩 나듯 매우 드물다. 비판과 질문을 던지는 자세의 측면만 보더라도 선생들에게 감히 대들던 1970~1980년대 대학생들보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규격화된 지식을 숙지시켜 규격화된 인재를 대량생산하는 현재 방식의 교육은 창조성의 시대에 맞지 않다.

이러한 학계나 교육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 지식생태계와 무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실험적 사고나 시도를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위험하다고 평가하는 보수적 인식, 같은 주장과 분석을 하더라도 한국 학자보다는 해외, 특히 미국의 학자나 전문가에 주로 주목하는 풍토, 지도교수의 생각을 감히 비판하거나 넘어서려고 하지 못하는 지적 분위기, 다른 생각은 틀린 생각이라는 편 가르기와 이념적 구별 짓기, 걸핏하면 종북이나 수구꼴통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치풍토가 젊은이들과 학자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 및 시도를 가로막고 있다. 논리적 논쟁보다는 인신공격이나 이념적 공격을 주로 하는 인터넷 댓글 문화도 창의성을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이다. 통치의 차원에서 보자면 다른 생각과 다른 사고, 그리고 실험적 사고와 시도를 다양한 권력기구와 기술을 통하여 통제한 지난 정권 역시 한국의 창조성 교육에 역행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경제를 한국 경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박근혜 정부는 우선 이러한 사회 전반의 지식생태계를 교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등교육과 연구의 문제 등 창조성 인프라 개혁에 보다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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